그 하고 많은 술 중에 왜 나냐고?
당연히 술 하면 나 아니겠어? 뭐 맥주?
에이, 걔랑 나랑 섞는 걸 뭐라 불러.
쏘맥. 내가 앞에 있잖아.
세상이 이유 없이 앞자리를 주진 않는 법. 내가 앞이라는 건, 술을 아는 자들에게 내가 더 강력하고 우선이란 거지. 이 말은 곧, 인생 희로애락을 안주 삼아 너희와 함께 세월을 난 술은 나라는 건데 어떻게, 인정?
좋아. 그럼 이젠 내가 인정할 차롄가.
나도 알아. 내가 모두에게 사랑 받는 건 아니라는 것. 속상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생각해도 난 냄새부터가 겪어볼 생각도 안 들게 고약하니 그들 취향을 존중해야지.
왜 인생 얄궂다고 하잖아. 너네 사는 게 좀 힘들다 싶음 나 생각해라. 몸에선 누구든 맡으면 얼굴 찌푸리는 냄새 나지. 근데 내가 어디 향만 그 모양이니. 입에 들어가도 똑같지. 그러니 나라면 겪어보지도 않고 학을 떼거나 걔 참 질 안 좋다 하는 사람이 어딜 가든 한 트럭이야. 잘못한 것도 없이 미움받고 사는 기분... 어떨 것 같아? 저런 애도 있구나 생각하면, 너네야 힘이 저절로 나야하지 않겠어?
뭐 나도 까짓꺼 그런 것쯤 다 괜찮고 다 견딜 건데 이거 하나만큼은 꼭 알아줬음 좋겠어. 적어도 나는 음흉한, 앞뒤 다른 애는 아니라는 거.
그걸 어떻게 믿냐고? 자, 봐라. 향도 쓴데 맛도 써. 먹을 때 썼는데 먹고 나서도 쓰다? 아니 무슨 그 다음 날까지 써요. 겉과 속 똑같은 거도 참 융통성도 없단 건데 이게 뭐겠니. 배신은 안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이 내 앞에서 꺼내는 그 오만 비밀들. 내 몸에 맥주 아니 그보다 더 한 게 들어와도 난 말 안 해. 주류가 갖춰야 할 제1의 덕목? 의리! 술은 모름지기 입이 무거워야 하는데, 입 무겁기론 하... 됐다. 입이 무거워서 말을 못 잇겠다.
쉿, 놀라긴 일러. 향도 맛도 투박하니 무뚝뚝할 거 같겠지만, 나 사실 주류 계의 츤데레야. 낯을 가려 그렇지 친해지면 와인 샴페인은 고개도 못 디밀게 스윗하다?
왜 다들, 나 털어 넣곤 "키야, 달다 달아" 하는 거 들어봤지. 어디 다른 애들 마시고 누가 그러디? 그냥 본능적으로, 너희 DNA가 아는 거지. 인생 단맛 쓴맛 녹진히 베어난, 니들 인생 액기스는 나라는 걸.
좋아, 잘 따라오는 거 같으니 본 토크 시작! 응, 믿기 힘들겠지만 여기까진 서론이었어...
너네! 양심적으로 내 핑계 좀 그만 대줄래?
왜 술 마신 다음날 오만데서 날 소환하니? 침대서 이불 뒤집어 쓰고, 지옥철에서 구역질 참으면서, 변기 붙잡고 웩웩하다 말고 하는, 나는 영문 모르는 니들 하이킥에 어째서 내 지분이 상당해?
"술이..." "술김에..." 나 왜, 내가 뭐.
지들이 저지르고는 뻑하면 술이 웬수래. 우리 부모님 들으시면 피눈물을 흘리셔 이것들아.
그리고 뭐 술이 술을 먹었다고? 말이 심하다 너네. 지네가 다 마셔놓고 그리고 상식적으로 내가 나를 내 친굴 내 가족을 어떻게 마시니. 최소한 우릴 동족상잔의 비극을 범하는 야만적인 족속들로 만들지는 말아주라.
또 니들 삼겹이고 소곱창이고 불판에 굽고 지지는 거 먹을 때, 걔네랑 내 합이 좋다고 삼쏘니 곱쏘니 애칭 붙이는데 거까진 좋아. 이름이 귀여우니까 내가 뒷글자로 빠진 건 이해해줄게.
근데 제발 좀 소주잔은 불판 멀찍이 놔줄래? 뜨거워 뜨거워 뜨겁다고 이것들아!
입장이란 걸 바꿔서 생각이란 걸 해보렴. 내가 잔에 따라진다는 건 말야. 너네 만나겠다고 좁은 병에 갇힌 채로 박스에 또 감금, 그러다 냉장고에서 동사할 위기까지 겪고 나서야... 그러니까 마침내 너희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희 테이블로 가 꽃이 되는, 뭐 그런 거거든?
그러니 어떨까. 흠집 안 내고 티끌 안 묻히며 오매불망하다 드디어 만난 건데, 그 찬란한 자태를 맘껏 뽐내고 싶지 않겠어?
근데 뽐은 개뿔. 냉장고 탈출해서 병에서 해방되기 무섭게 뭐가 막 날아와. 막 튀어.
막 묻어. 돼지기름 소기름, 김치 국물...
지들 옷엔 튀지 말라고 앞치마로 철벽 방어를 하면서 나는 안중에도 없어.
나도 우리 집에선 귀한 자식이고, 나에게도 자존감과 자기애라는 게 있다. 니들이 집에서 세팅하고 나온 그대로 있고 싶은 것처럼 나도 병에서 갓 따라져 나왔을 때의 청초한 상태로 머물고 싶다고. 정녕 이게, 그렇게 큰 욕심인 거니?
됐다. 이렇게 먹음 숙취 덜하다면서 기본 안주로 나온 오이 뚝 잘라서 소주잔에 담가놓는 애들한테, 색깔 예쁘다고 죠스바 스크류바 온갖 빙과류 우려내는 니들한테 뭔 기대를 하니 내가. 앓느니 죽지.
말하다보니 나 니들한테 맺힌 것만 많은양 된 것 같은데 오해 마라. 이건 그동안 말 못 한단 이유로 내가 받고 산 오해에 대한 설움을 게워낸 거니까. 니들이 나 마시고 게워내는 거랑은 좀 다른 게움이긴 하다만.
사실 내가 니들테 각 잡고 하려던 말은,
흠... 낯 간지럽지만 고맙다는 거였어.
지구 생명체 중에 나를 찾아주는 게 니들 밖에 더 있냐. 말이야 바른 말로, 나를 만든 것도 니들이고 그러니 고맙지. 귀하지.
만들어만 놓고 방치하는 것도 아니고 꽤 쓸모 있는 존재구나 느끼게끔 해주니까 더 말해 뭐하겠어.
옛일이지만 왜 너희랑 우리 술들은 다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잖아. 그렇게 갈라놔. 무조건, 아묻따 19년 동안 만나지 말래.
그 생이별 끝에 만나서 그런가. 나를 어찌나 살벌하게 챙기는지, 니들 기쁠 때건 슬플 때건 그 한 구석엔 꼭 내가 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안 기다리고 베기겠어. 오늘은 이 녀석들이 또 무슨 이유 붙여서 날 보러 오려나 궁금하고 설렐 수 밖에.
나 혼자 있는 하루는 니들 말로 핵노잼인데, 너희들만 만나면 일기에 쓸 얘기들이 넘쳐나. 니들 보는 맛에 살아.
But... 그렇다고 잘했다는 건 아냐. 골치 아플 때도 많아. 저것들 비싼 돈 주고 기분 좋게 잘 먹어놓고 왜 저러나 혀 찰 때가 수두룩한데, 그래도 날 찾는 시작은 항상, 잘 했다고
등 두드려 주거나 힘 내라고 어깨 토닥이고 싶은 일들이니까. 나는 그 맘을 높이 사려는 거지.
느닷없긴한데, 가물가물할 거고 또 애기들은 모를 테지만, 왜 옛날엔 거리에 카페보다 많은 게 공중전화였잖아. 거기 보면 꼭 붙어있던 거 기억나냐. '용건만 간단히'.
그것도 왜 붙었게. 나만 마셨다 하면 가란 집엔 안 가고 백이면 백 공중전화 박스로 가서는 들어갔다 하면 하세월이라 붙인 거야.
말도 마라 진짜 징글징글했다. 술도 안 적당 용건도 안 간단. 취중진담 노래가 여럿 베려놨지.
근데 나 이만 줄여야겠다. 용건만 간단히를 나부터가 안 하고 있었어... 그니까 결론은 우리 오래 보자는 거야. 한 번 만나서 오래 말고, 가끔 만나면서 오래도록 보는 그거.
그러려면 너희가 건강해야 하는 거 알지? 그러려면 나와는 거리 둬야 하는 것도?
사회적 거리두기 끝나서 좋다 했을 텐데 이번엔 나네. 그래도 다행인 건 뭔줄 알아? 강화도 완화도 니들 맘이라는 거.
단, 언제든 나에 대한 지나친 애정은 건강에, 다음날 출근, 휴대폰 통화, 카카오톡 목록에 해롭고 괴롭다는 거...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