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 반대 한 번 눈물나게

by 씀씀


| 결혼을 반대당했다.

'딸만 둘'이라 안 되겠다는 이유였다.

무슨... 이지 싶어 디든 꼬집으려는데 온 근육과 신경들이 벌써부터 저 아프다며 난리였다. 겠어, 단 꿈은 아니라는 거고.


그럼 뭐, 이벤트? 아 프러포즈 땜에?

여간 짓궂긴! 그래도 준비한 성의가 있을 테니 눈치 못 챈 척 당황 반, 놀람 반의 얼굴을 꺼내려는데... 응? 뭐야? 내 앞에 찐으로 울 것 같은 이 남자는? 고개는 왜 또 저렇게 숙이다 못해 꺾 있는 건데...


아 잠깐만. 이벤트도 아님 야. 그니까 나 지금 성격도 아니고 성별 차이, 것도 형제 성별 때문에 결혼 못 한다는 진짜는 거야?




'결혼하겠다. 인생을 함께 하고픈 여자가 생겼다' 보통은 인생에 한 번 한다는 그 고백은 마흔한 살 된 내 남자 친구의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이라 가족들이 몹시 놀랄 거라며 들뜬 얼굴이 어찌나 귀엽던지. 40대 남자도 이렇게 소년 같을 수 있구나 생각하며 그래, 나도 이 사람에게만큼은 평생 소녀처럼 수줍은 여자가 되겠노라 다짐했었다. 혼기를 꽉 채운 남녀가 남은 날은 부부로 살겠다 결심했으니 이제 그 앞은 그저 핑크빛 투성이면 될 일이었다.


"가서 얘기드리고 전화할게"

겨우 그 한마디 더 붙었을 뿐인데 늘 갖던 헤어짐이 어제는 어찌나 뭉클한지. 남자 친구 어깨를 조물조물, 엉덩이도 툭툭 토닥여주고서야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게 이런 거였어?' 나도 이제 남편 될 남자가 있는 여자라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 고개는 빳빳해지는 게 여간 우스웠지만 서른여섯에서야 찾아온 이 순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거기서 겨우 하루. 다시 마주한 그 앞에 나는, 남편이 될 예정이던 남자는 물론 멀쩡한 남자 친구까지 세트로 잃어버릴 처지의 여자가 돼버렸다.




, 일단 멘탈을 잡아보자. 지금 이게 얼마나 기막힌 상황인지는 파악됐으니까 답을 찾아보는 거야. 당장 뭘 해야 하지?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엄마 나 괜찮으니까 아빠도 내가 커버칠 테니까, 어디 숨겨놓은 아들 없냐고 물어봐? 아님 여동생? '야 넌 뭐가 급하다고 고추도 안 달고 나왔냐. 이왕 나오는 거 하나 챙겨 나오지'라고 톡을 보내?


둘 다 아니야? 그럼? 대체 딸만 둘이어서 안 된다는 결혼 반대는 뭘로 어떻게 무릅써야 하는데?




보통은 아들, 것도 마흔을 넘긴 아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하면 대개는 환호로 시작하지 않나. 그러곤 질문 공세로 정신없는 것도 잠깐, 어서 그 고마운 아가씨 데려오란 축하와 응원들로 남자의 귓가가 소란스럽다가, 얼마 후에 여자는 여자를 세상 궁금해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눈길들에 쌓여서 고운 아가씨네,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하는 환영을 받 그런 전개...

좀 뻔해도 스무스하잖아? 그게 맞잖아?


적어도 난 그렇게 알고 살았는데, 어째서 내 결혼 앞엔 그 기쁜 것들은 없고 딸만 둘이라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반대만 떡하니 놓여있는 걸까.

"오빠랑 살려고 내가 엄마 아빨 안 보고 살아야 해?"

"아니 미쳤어"

"그치. 난 아냐. 내가 왜. 오빠가 나와"

"어?"

"오빠가 집 나오라고"

방황하는 청소년, 인생이 고달픈 취준생도 아닌 마흔한 살이나 먹은 남자한테 가출을 종용하게 될 줄이야. 말문이 막히기란 둘 다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집 나오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냐는 그의 말 어찌나 꼴보기 싫고 얄밉던지


"그럼? 나더러 우리 집 가지 말라고? 그게 말이 돼? 그니까 오빠가 나오라고. 그래야 충격을 받든 하실 거 아냐. 내가 우리 집 연 끊으면 허락하시겠다는 게 허락 같아? 못 할 거 알고 하시는 말이잖아. 어쩔지 대책도 없어 집도 안 나가. 그러면서 평화적으로 뭘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데! 말을 해봐 해보ㄹ.."


가속도가 붙으려는 순간, 카페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내일 아침쯤 종로 카페에서 폭주하는 미친년으로 sns에서 핫해져도 어쩔 수 없다 이건. 겸허히 유명세를 받아들이겠다며 호흡을 가다듬는데 말 같지 않은 것이 또 한 번 귀로 돌진해왔다.

"마지막엔 결혼하라셨어"

"뭐? 딸만 둘이라 안.."

"친정 안 가겠각서 쓰고 결혼하라셔"



... 채플린 오빠.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면서요. 근데 내 인생은... 왜 어디서 보든 비극이고, 오래 보아도 자세히 보아도 예쁘지 않은 촌극인 거죠.

Q. 결혼을 두고 남길 문서가 있다면?


세상에 저런 괴상한 질문이 있을까 싶지만, 그 물음이 하필 내게 온다면 말하겠다.


A. 혼인신고서요!

Q. 그것 말고요.

A. 네? 음... 혼인서약서?

Q. 그것도 말고요.

A. 청첩장? 양가 부모님께 편지? 신랑한테 편지?

Q. 땡! 다른 분들한텐 그럴 수 있지만 아쉽게도 본인에겐 해당이 없습니다. 답은 각서입니다.

각서라. 지금 뭐 조선시대고 난 천민이었던 건가? 내가 미천한 출신도 모르고 사대부 집안에 시집가겠다는 발칙한 꿈이라도 꾼 거였어? 내 결혼이 금기를 깨고 세상에 도전하는 혼인이라도 되는 거냐고.


아니잖아. 난 2021년을 사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잖아. 근데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게 전부인 마음에 그런 악랄한 약속이 전제돼야 하는 거야? 거기다 난 왜 우리 엄마 아빠까지 욕보이는 이 반대를 듣고도 여기 앉아있는 거야? 어째서 헤어지잔 말이 목구멍 근처에 얼씬도 않는 거냐고.

멍했다. 각성한다는 카페인도 지 역할을 못 했다. 드라마에서처럼 카페에서 캐주얼하게 마무리될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일단 일어났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자는 뻔한 선에서 합의를 봤으니 이제부턴 헤어지는 방법과 타이밍에 대해 각자 고민하면 될 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전철은 말 그대로 절망이었다. 자꾸 꺾이는 무릎이 문젠지 엉망진창인 머릿속 때문인 건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듯 메스껍더니 눈앞이 일렁였고 기어이 멀미가 오려고 할 때쯤, 그래도 운 좋게 동네에 내릴 수 있었다.


지나가는 모두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딸이 둘이라서 결혼을 반대한다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친정에 안 가겠단 각서를 쓰면 허락한대요' '이 결혼할 수 있을까요?' '남자 어머님을 꺾을 자신이 없어요"


누군가는 그러겠지. 왜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냐. 어르신 억지에 너무 바로 두 손 두발 드는 거 아니냐. 사랑이라면서 그걸 인정받기 위해 고생할 마음은 없고, 곱고 편한 것만 하고 싶던 건 아니냐고.

그러게. 그렇담 차라리 억울하지나 않았을 천만의 말씀이네. 아무렴 남자 40 여자 35, 도합 75년을 걸려 찾은 짝을 어떻게 꼴랑 반대 한 번에 놓을 수 있겠는가. 그저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알기에 그런 것뿐.




우리 둘이 안 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안타깝게도 남자 친구는 이 세상 자식들의 최강의 무기이자 최후의 보루인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에 해당되지 않는 몸이었기 때문.


남자 친구가 천하의 불효자식이거나 그의 어머님이 자식의 눈물에도 아랑곳 않는 냉혈한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럴 수 있냐고? 그러니까 그건 말이죠.


그동안 우리 모두가 간과해 온 게 있었다. 바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에 숨겨진 한 글자. 자식과 부모라는 단어 앞에 그 글자가 붙어 있냐 아니냐에 따라 상황은 천지차이로 달라지고, 자식에게 져주는 부모란 대부분 그 글자가 붙어있을 때 등장할 만큼 절대적인, 그렇게 중요함에도 써놓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한 거라 굳이 드러내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하면 만인이 수긍할 한 글자, 친할 '친(親)'.


그랬다. 남자 친구와 어머님 사이엔 그 글자가 없었고, 그게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없는 이유였다.


어머님은 남자 친구의 친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생긴 새어머니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가짜이면서 진짜이기도한 남자 친구의 어머니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양어머니.


나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남자 친구와 법적 모자지간이 된 지 2년 차인 그의 어머니는 2년 전까지는 남자 친구에게 큰엄마였던 사람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