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유토피아, 정신과 11

by 씀씀


그날 점심은 한여름밤의 꿈같았다.

황홀하거나 달콤하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별안간 휘몰아쳐 어안이 벙벙한 탓에 현실감 제로라는 점에서, 꽤나 몽롱했다.


그러니 한 표현처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겠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그 무리의 존재를 알아차린 직후부턴 아예 한 술도 뜨지 않았 말이다.


회사 밖으로 나왔다고 해봤자 어차피 자동차 바퀴 엎어지면 닿을 거리. 그런 에 위치한 식당에서 사무실 사람 만난 게 뭐 대단한 사건이라고 바로 수저 내려놓고 식음을 전폐하냐, 과잉반응이라 여기는 이 있다면 지금부터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아주었으면 다. 놀랄 노자도 놀라고 갈 전개이니 말이다.




우리보다 이르게 일어선 뒷테이블의 일행에는 역시나, 빅모씨가 포함돼 있었다.


자, 렇다면 발등에 불 떨어진 것도 실해졌겠다. 나 자신은 더욱 분주히, 그 테이블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까지 나와 쌤이 나눈 대화를 복기다 실시!


걸리는 건 역시나 한 가지. 회사 힘들다는, 필요 이상으로 깔끔명료했던 내 한 마디의 푸념었다. 그도 그럴게 그 말이 빅모씨에게서 어떻게 재가공되어 회사 내에 널리 널리 퍼질지 모르는 일이었 때문.


본투비 는 감각 쪽으론 탁월한 캐릭터. 나이스한 눈썰미에 유독 청력이 발달한 케이스인 나는, 특히나 이곳 입사 후 그 감각들이 욱 레벨업 되면서 민감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지경이 되었더랬다.


그런 난데 그런 내가, 어찌 빅모씨의 등장을 놓칠 수 있지? 의아했으나 의문은 꽤 쉽게 풀렸다. 쌤이 주차하는 동안 좋은 자리 선점하겠다며 먼저 들어와 있던 5분여. 고개 숙여 폰으로 뭘 좀 사느라 몰두하던 그 잠깐에 들어왔다는 추정이 유력했다.


빅모씨 일행이 왁자지껄 자유롭게 점심을 즐기고 식당을 나설 때까지, 나와 쌤은 복화술에 더불어 손짓발짓눈짓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의사소통 또는 묵언수행.


이건 뭐 멀리서 보자면 한 명씩 와서는 사장님 권유로 하는 수 없이 합석한 테이블처럼 보이는 그림으로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흘려보 것으로 모자라,


그 고행 끝에 선 계산대에서저 사장님에게 여쭈길, 저희 뒷테이블 언제 들어왔나요? 손님 들어오시고 나서 들어오신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 , 아는 분인데 들어오시는 걸 못 봐서요.


할 만큼, 세상 별 걸 다 묻고 말 정도로 내 신경 저당 잡혀버렸음을 고백하는 바다.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빅모씨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건 그저 나의 과민이오 호들갑이라는 오해를 반드시 사고야 말 행동이었지만, 그런 오해도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코 내 기우에 지나지 않다는 게, 얼마 못 가 상상 이상의 일로써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바탕 난리통 끝에 돌아온 사무실에서는 마침 구내식당 메뉴에 관한 이야기 한창이었다. 늘 구내가 아주 맛있었다는 리뷰들. 거기에 빅모씨도 참가하셨으니. "그래? 메뉴가 뭐였길래? 난 약속이 있어서 못 갔네?"


순간 고민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빅모씨 보기를 돌 같이 하는 사람. 원래대로였다면 빅모씨의 발언에 내 목소리를 보태는 일이 결단코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특수상황.


약속이었다는 그 점심에 내가 같은 식당, 것도 앞테이블에 있었음을 빅모씨도 인지하고 있는지, 나아가 내가 회사 힘들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나의 평화를 위해.


- 낙지집 가셨었죠?


찰나였다. 초등학교 시절 웅변대회의 어린 연사가 했던 것처럼, 두 손으로 책상을 힘 있게 짚은 빅모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체감상 1초 남짓.


"어떻게 알았어???"

- 저 거기 갔었거든요"

"못 봤는데? 어디 있었어?"

- 뒷 테이블에요"

"하하하, 우리 회사 욕 되게 많이 했는데"

- 아, 하나도 안 들렸어요. 거기 되게 시끄러웠잖아요"


한 줄기 빛이 비쳤다. 한 시간짜리 대절망이 비로소 한 움큼의 희망으로 바뀌는 것 같았달까. 저 정도 반응에 저런 찐 텐션이라면 나를 못 본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르고 대환장파티로 엿 바꿔 먹은 내 작고 소중한 점심시간이 가슴에 사무쳤으나,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렴. 이미 저렇게 일단락 된 대화를, 한 3분 후쯤에 굳이 또다시. "근데 언제 왔어? 못 봤는데?"라며 빅모씨가 물어왔다는 것에서 반절짜리 희망은 이제 완벽하게 영롱해졌다고 할 수 밖에.


회사 욕을 많이 했다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본인이 지레 놀라 고해성사를 해 버린 것, 그녀의 평소 캐릭터로 미루어 보아 그 말은 200% 사실이었을 터. 그러니 빅모씨는 뒷테이블에 있었다는 내 존재가, 나와는 반대로 점심시간을 끝낸 그때부터 어금니와 송곳니 사이에 박힌 나물 반찬처럼 걸리적 걸리적, 기분 나쁘게 신경 쓰였으리라.


전혀- 하등 그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사람은 다 자길 기준삼기 마련이니. 내가 무언가를 들어 그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적어도 빅모씨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남의 일에 굳이 필요 이상으로 관심 갖고 전파하는 엔 흥미가 없었다. 아무리 그 대상이 내게 비호감인 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그날 점심시간 소동은 다행히도 그렇게 마무리.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건 원수고, 빅모씨는 외나무다리 빼고 여기저기 어디서든 만날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자라는 경각심을 일깨우며 일단락 됐다.


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있을까.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의 점심을 내 기억과는 다른 스토리로 굳이 또 마주하는 일을 겪 사람이.


뭐 대단한 점심이었다고. 그날의 낙지집 식사를 다시금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여후의 일. 누가 보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저명한 인사와, 분당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지불하고 치르는 점심식사로 알 노릇.


그저 옛 회사 절친한 동료와의 식사 한 끼가 어찌 이렇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걸로 모자라, 이 한창날의 숙녀를 정신과까지 몰고 가게 하는지. 이럴 일이었으면 그날 로또를 사둘 것을. 현명하게 화를 복으로 삼아보는 긍정의 힘 1g을 발휘해 볼 것을. 그러지 못한 것에 내내 목이 멕힌다.


냉수 원샷했다 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한여름밤의 꿈같다던 그 점심을 다시 마주한 것은 9월 초.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기억 안 나는 마당에, 느닷없이 두 달 전 점심을 상기시켜야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그 시작은 이랬다.


한 동료 말하기를, 내게 할 말이 있단다. 아예 용건의 시작이 '드릴 말씀이 있는데'였으니, 이건 뭐 각 잡고 듣지 않을 수가 없는 스타트.


- 네, 말씀하세요.


나에게 남이 한 말이자, 그 남이 남에게 들은 말임에도 얼마나 쇼킹했으면 듣는 순간 바로 각인되어 워딩 그대로 기억하는 바. 그러니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길 수 있고 옮기고 싶지만. 사실 적시도 명예훼손이 되는 요지경인 세상. 하물며 이곳도 그 세상천지에 오픈된 곳이기에 적당히 에둘러 담겠다.


- 네, 말씀하세요

"숙녀님이 남자친구가 있대요"

- (엥?)

"남자친구랑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손을 잡고 먹었대요"

- (엥?)


뭐라는 거야. 당최 뭔 소릴 하나 싶었기도 잠깐. 아... 뒷전을 후려갈기는 그 여름날의 기억. 강력한 한 방이 후두엽을 때렸다.


"그거 빅모씨가 한 말이죠?"


자신 있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확신했다.


나는 점심시간 사무실 지박령인 애다. 그러니 내가 점심시간 밖에서 밥을 먹은 것은 나의 기억에서 무채색이 아니라 완전한 원색이다. 심지어 사 근처에서 남자? 그건 몇 년 전의 일까지도 라이브로 떠올릴 수 있 영역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내 기억으로 도무지 소멸 안되는 있었으니, 손이었다. 손을 잡았다고? 난 회사 근처에서건 어디서건 남자랑 손을 잡고 밥을 먹은 기억이 없.....데 맙소사, 그걸 상쇄하는 마법의 키워드가 있었으니.


아이쎄이 빅, 유쎄이 모씨. 빅, 모씨.


십중팔구 두 달 전, 낙지집을 말한 것이리라.


십년지기 옛 회사 동료가, 남자친구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와우. 우리나라 결정사 다 문 닫아야겠네. 이런 말도 안 되는 서사로 놀라운 매칭을 보여주는, 하늘이 내린 중매쟁이를 다 봤나.


할많하않. 일단 들어보자.


- 그래서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의 유토피아, 정신과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