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거나 달콤하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별안간 휘몰아쳐 어안이 벙벙한 탓에 현실감제로라는 점에서,꽤나몽롱했다.
그러니 흔한 표현처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겠다생각할 수도 있지만그건 또 아니었다. 그 무리의 존재를 알아차린 직후부턴 아예 한 술도 뜨지 않았으니말이다.
회사 밖으로 나왔다고 해봤자 어차피 자동차 바퀴 엎어지면 닿을 거리. 그런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사무실 사람 만난 게 뭐 대단한 사건이라고 바로 수저 내려놓고 식음을 전폐하냐, 과잉반응이라 여기는 이가있다면지금부터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놀랄 노자도 놀라고 갈 전개이니말이다.
우리보다 이르게 일어선 뒷테이블의 일행에는 역시나, 빅모씨가 포함돼 있었다.
자, 그렇다면 발등에 불 떨어진 것도확실해졌겠다.나 자신은더욱 분주히, 그 테이블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까지 나와 쌤이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실시!
걸리는 건 역시나 한 가지. 회사 힘들다는, 필요이상으로 깔끔명료했던 내 한 마디의 푸념이었다.그도 그럴게 그 말이 빅모씨에게서 어떻게 재가공되어 회사 내에 널리 널리 퍼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
본투비 나는 감각 쪽으론 탁월한 캐릭터. 나이스한 눈썰미에유독 청력이 발달한 케이스인 나는, 특히나 이곳 입사 후그 감각들이 더욱 레벨업 되면서 민감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지경이 되었더랬다.
그런난데 그런 내가,어찌 빅모씨의 등장을 놓칠 수 있지? 의아했으나의문은 꽤 쉽게 풀렸다. 쌤이 주차하는 동안 좋은 자리 선점하겠다며 먼저 들어와있던 5분여. 고개 숙여 폰으로 뭘 좀 사느라 몰두하던 그 잠깐에들어왔다는 추정이 유력했다.
빅모씨 일행이 왁자지껄 자유롭게 점심을 즐기고 식당을 나설 때까지, 나와 쌤은 복화술에 더불어 손짓발짓눈짓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의사소통또는 묵언수행.
이건 뭐 멀리서 보자면 한 명씩 와서는 사장님 권유로 하는 수 없이 합석한 테이블처럼 보이는 그림으로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흘려보낸 것으로 모자라,
그 고행 끝에 선 계산대에서마저사장님에게 여쭈길, 저희 뒷테이블 언제 들어왔나요? 손님 들어오시고 나서 들어오신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 아, 아는 분인데 들어오시는 걸 못 봐서요.
할 만큼, 세상 별 걸 다 묻고 말 정도로 내 신경을 저당 잡혀버렸음을 고백하는 바다.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빅모씨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그건그저 나의 과민이오 호들갑이라는 오해를 반드시 사고야 말 행동이었지만, 그런 오해도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코 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얼마 못 가 상상 이상의 일로써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바탕 난리통 끝에 돌아온 사무실에서는 마침 구내식당메뉴에 관한 이야기가한창이었다. 오늘 구내가 아주 맛있었다는 리뷰들. 거기에 빅모씨도 참가하셨으니."그래? 메뉴가 뭐였길래? 난 약속이 있어서 못 갔네?"
순간 고민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빅모씨 보기를 돌 같이 하는 사람. 원래대로였다면 빅모씨의 발언에 내 목소리를 보태는 일이 결단코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특수상황.
약속이었다는 그 점심에 내가 같은 식당,것도 앞테이블에 있었음을 빅모씨도 인지하고 있는지, 나아가 내가 회사 힘들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나의 평화를 위해.
- 낙지집가셨었죠?
찰나였다.초등학교 시절 웅변대회의 어린 연사가 했던 것처럼, 두 손으로 책상을 힘 있게 짚은 빅모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까지 걸린 시간은체감상 1초 남짓.
"어떻게 알았어???"
- 저 거기 갔었거든요"
"못 봤는데? 어디 있었어?"
- 뒷 테이블에요"
"하하하, 우리 회사 욕 되게 많이 했는데"
- 아, 하나도 안 들렸어요. 거기 되게 시끄러웠잖아요"
한 줄기 빛이 비쳤다. 한 시간짜리 대절망이 비로소 한 움큼의 희망으로 바뀌는것 같았달까. 저 정도 반응에 저런 찐 텐션이라면 나를 못 본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르고 대환장파티로 엿 바꿔 먹은 내 작고 소중한 점심시간이 가슴에 사무쳤으나,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렴. 이미 저렇게 일단락 된 대화를, 한 3분 후쯤에 굳이 또다시. "근데 언제왔어? 못 봤는데?"라며 빅모씨가 물어왔다는 것에서 반절짜리 희망은 이제 완벽하게 영롱해졌다고 할 수 밖에.
회사 욕을 많이 했다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본인이 지레 놀라 고해성사를 해 버린 것, 그녀의 평소 캐릭터로 미루어 보아 그 말은 200% 사실이었을 터. 그러니 빅모씨는 뒷테이블에 있었다는 내 존재가, 나와는 반대로 점심시간을 끝낸 그때부터 어금니와 송곳니 사이에 박힌 나물 반찬처럼걸리적 걸리적, 기분 나쁘게신경 쓰였으리라.
전혀- 하등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사람은 다 자길 기준삼기마련이니. 내가 무언가를 들어 그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일 테지만,나는 적어도 빅모씨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남의 일에 굳이 필요 이상으로 관심 갖고 전파하는 것엔 흥미가 없었다. 아무리 그 대상이 내게 비호감인 자라 하더라도말이다.
어쨌거나,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그날 점심시간소동은 다행히도 그렇게 마무리.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건 원수고, 빅모씨는 외나무다리 빼고 여기저기 어디서든 만날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자라는 경각심을 일깨우며 일단락 됐다.
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있을까.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의 점심을 내 기억과는 다른 스토리로 굳이 또 마주하는 일을 겪는 사람이.
뭐 대단한 점심이었다고. 그날의 낙지집 식사를 다시금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여후의 일. 누가 보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저명한 인사와, 분당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지불하고 치르는 점심식사로 알 노릇.
그저옛 회사 절친한 동료와의 식사 한 끼가 어찌 이렇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걸로 모자라, 이 한창날의 숙녀를 정신과까지 몰고 가게 하는지. 이럴 일이었으면 그날 로또를 사둘 것을. 현명하게 화를 복으로 삼아보는 긍정의 힘 1g을 발휘해 볼 것을. 그러지 못한 것에 내내 목이 멕힌다.
냉수 원샷했다 치고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내가 한여름밤의 꿈같다던 그점심을 다시 마주한 것은 9월 초.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기억안 나는마당에, 느닷없이 두 달 전 점심을 상기시켜야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그 시작은 이랬다.
한 동료 말하기를, 내게 할 말이 있단다.아예 용건의 시작이 '드릴 말씀이 있는데'였으니, 이건 뭐 각 잡고 듣지 않을 수가 없는 스타트.
- 네, 말씀하세요.
나에게 남이 한 말이자, 그 남이 남에게 들은 말임에도얼마나 쇼킹했으면 듣는 순간 바로 각인되어 워딩 그대로 기억하는 바. 그러니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길 수 있고 옮기고 싶지만. 사실 적시도 명예훼손이 되는 요지경인 세상. 하물며 이곳도 그 세상천지에 오픈된 곳이기에 적당히 에둘러 담겠다.
- 네,말씀하세요
"숙녀님이 남자친구가 있대요"
- (엥?)
"남자친구랑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손을 잡고 먹었대요"
- (엥?)
뭐라는 거야. 당최 뭔 소릴 하나 싶었기도 잠깐. 아... 뒷전을 후려갈기는 그 여름날의 기억. 강력한 한 방이 후두엽을 때렸다.
"그거 빅모씨가 한 말이죠?"
자신 있었다.단언할 수 있었다. 확신했다.
나는 점심시간 사무실 지박령인 애다. 그러니 내가 점심시간밖에서 밥을 먹은 것은 나의 기억에서 무채색이 아니라 완전한 원색이다.심지어 회사 근처에서 남자랑?그건 몇 년 전의 일까지도 라이브로 떠올릴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내 기억으로 도무지 소멸 안되는 의문이 있었으니, 손이었다. 손을 잡았다고? 난 회사 근처에서건 어디서건 남자랑 손을 잡고 밥을 먹은 기억이 없는.....데 맙소사, 그걸 상쇄하는 마법의 키워드가 있었으니.
아이쎄이 빅, 유쎄이 모씨.빅, 모씨.
십중팔구 두 달 전, 낙지집을 말한 것이리라.
십년지기 옛 회사 동료가, 남자친구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와우. 우리나라 결정사 다 문 닫아야겠네. 이런 말도 안 되는 서사로 놀라운 매칭을 보여주는, 하늘이 내린 중매쟁이를 다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