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국민 여동생은 누구일까? 처음으로 국민 여동생이라고 불리웠던 여가수는 혜은이였다. 이미자와 하춘화, 남진과 나훈아가 우리 부모들 세대의 오디오형 스타였다면 우리 세대에게 비디오형 아이돌로 처음 각인된 가수는 혜은이가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리여리하지만 귀여운 외모와 부드러운 음색으로 한방에 대중들을 매혹시킨 여가수. 모든 팬들의 관심과 흠모를 받는 동시에 그만큼의 질시와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끊임없는 스캔들로 그녀의 가수 생활은 화려한 만큼 이면의 질곡도 많았던 여정이었다.
그 여정의 출발점에 길옥윤 작곡가가 있다. 색소폰 연주자이며 재즈 작곡가였던 그는 데뷔 이후 연주와 작곡을 병행하며 스타 가수 제조기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패티김과의 협업으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후 그녀와의 결혼을 통하여 개인사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음주가무와 흡연을 즐기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한량 같은 성향으로 패티김과 불화하며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작곡가로서도 새로운 곡을 내지 못하고 슬럼프를 겪던 그에게 제주도 출신, 스무 살의 앳된 소녀가 운명처럼 다가온다.
그녀의 이름은 김승주, 예명인 혜은이로 유명해진 그녀는 1975년 길옥윤이 작곡한 '당신은 모르실 거야'로 데뷔를 하고 1977년 '당신만을 사랑해'라는 곡으로 제1회 서울가요제 대상과 연말 MBC최고가수상을 거머쥔다. '새벽비'와 '진짜진짜 좋아해' 등으로 댄스가수로도 입지를 넓혀갔다. 1979년 댄스곡인 '제3한강교'로 최고가수상을 두 번 수상하며 길옥윤과 혜은이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계속될 것 같았던 그들의 인기는 여가수와 남자 작곡가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다.
가요제 시상식에서의 잦은 스킨십 등이 가십거리로 회자되며 자유로운 로맨티시스트였던 길옥윤의 기질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후 혜은이는 이범희, 지명길 등 신진 작곡가들의 곡들을 받으며 길옥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길옥윤은 이후 대중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1995년 폐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혜은이는 1980년대에도 독백, 열정, 파란 나라 등을 계속 히트시키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음악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개인사는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여가수들의 생활력이 가족들의 무능력을 야기시키는 흑역사가 운명의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악극단의 단장이던 아버지의 보증채무를 갚기 위해서 무교동 비어홀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던 슬픈 가족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업가 최정호 씨와의 첫 결혼이 짧게 마무리되고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 김동현이라는 남자 배우가 구애를 해온다. 그의 진정성에 감동을 받아 결혼을 하게 되지만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그녀는 가수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대부분의 수입을 빚을 갚는 데 사용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운명의 굴레 같던 결혼은 딸과 아들의 양육이라는 의무 때문이라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아이가 모두 자란 최근에야 두 사람은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며 합의 이혼하게 된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혼 후 그녀는 경제적인 목적의 공연보다는 자유로운 방송활동을 통하여 그녀의 일상을 대중들에게 공유하며 편안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모습처럼 그녀의 인생 후반전이 화려했던 그녀의 데뷔 시절처럼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행복한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되기를 모든 팬들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자유분방했던 천재 작곡가의 전성기 창작능력이 낳은 '당신만을 사랑해'는 재즈풍의 색소폰 연주와 함께 따사로운 봄날 제주도의 바람같이 감미로운 혜은이의 음색에 실려 대중들의 귓가에 영원히 울려 퍼질 것이다. 그대, 당신만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