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코로나바이러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각본상, 감독상, 국제 장편영화상 및 작품상 등 네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받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것이 동양인이 미국이 아닌 자국에서 만든 영화로 오스카상을 받는 것이 워낙 흔하지 않은 일인 데다가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작품상을 받은 것은 역사상 최초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인 외할아버지와 화가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봉 감독은 특유의 디테일로 봉테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플란다스의 개’를 데뷔작으로 하여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통하여 명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통하여 세계의 거장이 되었다.
보편적 주제인 빈부격차와 계급 문제를 무겁지 않은 가벼운 터치로 유쾌하게 접근하는 것이 연출의 장점인 봉 감독은 전작인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에서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던 하층민들이 폭동을 통하여 상위계급들에게 도전하는 스토리를 소개한 바 있다.
설국열차의 계급 구분이 열차의 하위 칸과 상위 칸으로 구분되듯이 기생충에서 그것은 지하와 지상의 세계로 표현된다. 노상방뇨와 소독약, 와이파이 불통 등의 불편함이 일상인 반지하방과 저명한 건축가가 정원을 통해 사시사철 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한 단독 주택이 대비되고 묘한 소독약 냄새가 나는 지하철과 쾌적하고 상쾌한 벤츠의 향기가 비교된다.
기생충에서 하위계급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상위계급을 숙주로 하여 그들의 성과를 일부 분여 받는 방식이다. 숙주의 성공은 곧 그들에게 배분될 파이가 커지는 전조이다. 친구의 과외선생 대타로 시작된 기생충들의 숙주 점령은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의 미술치료사로 누이를 끌어들임으로써 확대되더니 아버지를 운전수로, 어머니를 가사도우미로 취직시킴으로써 완성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의 운전수를 바람둥이로 몰아 쫓아내고 가사도우미를 결핵환자로 만들어 나가게 만든다. 하나의 숙주를 독차지하기 위한 기생충들 간의 전쟁은 한 가족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이지만 본인들의 성과가 아닌 남의 성과에 기대어 사는 삶은 불완전하게 이어지며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기생충에서 하층민들이 상층민을 숙주로 하여 생계를 이어가듯이 최근 발생하여 전 세계를 감염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린 코로나바이러스도 인간을 숙주로 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어간다는 데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봉 감독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4관왕을 하고 국내로 입국하여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아 축하를 받는 날 하필이면 신천지 사태를 기점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급격히 증가하여 봉 감독의 영광이 묻히는 느낌이 들어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루어낸 업적이 과소평가되거나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영화 ‘기생충’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는 처음 겪어보는 많은 일과 맞닥뜨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 방학이 끝나도 학교에 갈 수 없도록 휴교를 하다가 온라인 개학이라는 초유의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혼밥과 마스크 쓰기가 일상화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 등 아시아에서 처음 유행을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 유럽을 강타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600만 명 이상을 확진시키는 전염력으로 전 세계를 공포와 혼란 속으로 몰고 가고 있는 중이다.
우한 폐렴으로 불렸던 코로나바이러스는 특정지역에 대한 혐오를 야기한다는 이유로 COVID19, 한글로 코로나바이러스 19로 명칭이 정정되었다. 신천지 사태를 기점으로 한국에서도 대구/경북지역에 환자 발생이 증가하자 대구 폐렴 등으로 불리며 특정지역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였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자신과 다른 인종, 지역, 성별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가 잠재하여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잠재된 혐오감에 촉매제가 투여되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제도화되어 이런 원시적이고 무책임한 혐오감이 사회 시스템에 의해 제어되지만 집단적인 전염병 증가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맞이하여 사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서로를 혐오하며 폭력적으로 맞서는 인간 본성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집단적 혐오감이 확대되지 않고 대구/경북지역에 대한 의료봉사지원 및 전국 각 지역에서 물품 및 병상을 지원하는 등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질서를 잘 지키기로 소문난 일본에서조차 사재기 열풍이 부는 모습을 보면서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기생충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숙주들의 불안감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자 코로나바이러스가 최초로 발생한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인들 전체에 대한 공격적인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반응이라고 반성하고 있지만 당분간 해외로 출국하기가 겁날 정도로 집단적인 광기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분) 일가는 숙주인 박사장(이선균 분) 일가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기생충으로 묘사된다. 이선균이 연기하는 박사장은 기택 일가를 고용하여 집안일과 운전 일을 맡기며 월급을 주어 일견 그들의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친절하고 자상하게 피고용인들을 대하지만 그것에는 일정한 선이 있다. 넘기면 안 되는 선을 지켜야 그들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박사장은 기택 가족에게 지하철의 냄새가 난다며 불쾌감을 드러낸다. 본인들은 맡을 수 없는 냄새를 맡는 박사장 가족에게 기택은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 가족이 숙주에게 기생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이기에 이질감이 바로 혐오감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숙주의 성공이 본인들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의 우수함을 찬양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은 숙주와 기생충간의 관계가 아닌 기생충 내부에서 발생한다. 먼저 숙주를 점령하고 살아가던 문광과 근세, 집사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던 문광은 자신의 남편을 지하 비밀창고에 살게 하여 숙주에게 기생하게 한다. 박사장이 의아해하던 그녀의 식탐은 사실 2인분의 식사가 필요했던 자신의 사연에서 기인한다.
먼저 숙주를 점령했던 문광 가족이 기택 가족의 모략에 의하여 쫓겨나고 문광이 남편의 기생을 부탁하기 위하여 박사장 가족이 가족캠핑을 간 날 박사장의 저택으로 찾아오면서 불길한 반전이 시작된다. 문광이 자신들이 기택 가족의 모략으로 쫓겨난 사실을 알고 기생충간의 위치가 역전되었지만 기택 가족의 반격으로 복도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다쳐 목숨을 잃게 되는 문광. 아내를 잃은 근세는 박사장의 가든파티에서 기택 가족에게 피의 복수를 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기택이 자신을 혐오하는 박사장을 죽이게 되는 결말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피츠제랄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에서 아버지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박사장이 기택이 살아온 삶을 보았다면 기택의 냄새를 혐오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택을 혐오하지 않았다면 박사장은 기택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위대한 개츠비’ 소설에서 화자인 닉의 다음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 후로 나는 모든 것에 판단을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들이 툭하면 나에게 접근해왔고, 따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간들로부터 적잖이 시달림을 받았다.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봉준호 감독은 그의 출세작 ‘괴물’의 도입부에서 실험실에서 사용하던 유해 독가스가 하수구로 방출되며 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섬찟하게 묘사한다. 어쩌면 코로나바이러스도 기생충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낸 괴물이 아닐까? 봉 감독의 차기작이 ‘코로나바이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그때쯤이면 상황이 호전되어 마음 놓고 영화관에 가서 그의 다음 영화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