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왜 불러 토라질 때 무정하더니 왜 왜 왜 자꾸자꾸 불러 설레게 해
안 들려 안 들려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려 안 들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아아아아
아니 안되지 들어서는 안되지 아니 안되지 돌아보면 안 되지 그냥 한번 불러주는 그 목소리에 다시 또 속아서는 안되지
송창식은 천상 가수다. 작곡과 작사 능력도 인정받지만 그것은 그에게 노래를 하기 위한 우선 작업의 의미일 뿐 노래하는 가수로서의 정체성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대중들에게 설파해왔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어머니의 가출로 조부 밑에서 아버지의 경찰 연금으로 근근이 어렵게 자란 가정사는 그를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평생 남들과는 다른 삶을 지향하는 아웃사이더로 만들었고 음악은 이런 그에게 가장 적합한 도피처 및 위안처였다.
낡은 악보로 음계를 공부하고 음을 조합하여 작곡을 하는 어린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그는 그것을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꿈꾸며 예고에 진학하여 성악을 전공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클래식은 돈 없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무료로 레슨을 해주던 분이 떠나고 홀로 연습을 하며 공부를 했지만 비싼 레슨을 받으며 시험을 준비한 동급생들을 따라갈 수 없어 계속 유급을 하고 만다.
송창식의 꿈이었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예고 동기 금난새 지휘자는 그 시절 송창식이 배고픔을 잊기 위하여 학교 운동장의 수도가에서 물을 먹던 기억을 얘기할 정도로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를 포기하고 동창들이 다니던 대학교에서 같이 음악을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던 그에게 운명같이 기회가 찾아온다. 친구들을 따라갔던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조영남을 만난 것이다.
조영남은 가짜 대학생 흉내를 내며 거짓말로 자신의 가난을 위장하려던 그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리기도 하지만 펑크를 낸 가수의 대타로서 그가 부르던 오페라 아이다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에 매료되어 가수로서 그의 매력을 관계자들에게 적극 홍보해주어 그가 가수로서 데뷔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준다. 송창식도 성악을 전공한 조영남이 팝송을 멋지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클래식만을 음악으로 생각하던 편견을 버리고 팝송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세시봉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중창단을 결성하고 팝송을 번안하여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후에 멤버 이익균이 군대에 가면서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라는 듀엣으로 개편한다. '웨딩케이크'와 '하얀 손수건'등을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그. 윤형주의 유학으로 트윈폴리오는 잠시 중단하고 솔로 가수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군에 입대하여 AFKN에서 우연히 미국 흑인들의 아마추어 경연대회를 보고 그는 충격에 빠진다. 나름 프로 가수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실력이 취미로 하는 일반인들의 경연 곡보다 못하다는 현타에 그는 자존심의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팝송을 번안하여 부르는 것에 한계를 느낀 그는 자신만의 음악을 위하여 국악적 요소를 작곡에 가미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의 명곡들이 하나하나 탄생하게 된다.
'한 번쯤'과 '피리 부는 사나이'로 솔로 가수로서 존재감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그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그의 노래들이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청년문화의 기수로서 추앙받게 된다. '왜 불러'와 '고래사냥'이 영화의 대히트와 함께 1975년 MBC 10대 가수 청백전에서 최우수 인기가수상을 받으며 싱어로서 최고의 정점에 올라선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가수로서 최정점에서 시대는 가혹한 반격을 그에게 가한다. 대마초 파동과 함께 시작된 군부독재정권의 청년문화에 대한 탄압이 최고 인기가수였던 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왜 불러가 금지곡이 되고 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린다는 이유로 고래사냥이 금지곡이 된다. 사실 그는 선래적인 아웃사이더로 정치와 시위에 대해서 보수적인 의견을 갖은 사람이었다. 왜 불러는 러브송으로 작사 작곡하였고 고래사냥의 가사는 최인호 작가가 쓴 것으로서 그의 생각과는 무관하였지만 양희은, 김민기 등 체제 저항적인 노래를 불렀던 같은 포크가수로서 정권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수로서 목 관리를 위하여 대마초는커녕 담배도 하지 않았던 그를 신문기자가 유도신문을 통하여 다른 가수들이 대마초를 한 사실을 알아내고 기사를 내어 동료들에게 내부고발자로 인식되어 한동안 그는 동료 가수들로부터 소외를 받게 된다.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그의 아웃사이더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어 그는 양평에 집을 짓고 밤에만 활동하는 올빼미형 생활을 한다. 노래를 부르는 외부활동 외에는 자신만의 벽을 공고히 하고 개량한복을 입고 단전호흡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대중들은 점점 더 그를 기인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로, 예고 동기인 부인의 남편으로 음악만이 그들을 부양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처형의 두 아이를 입양하고 키워내며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했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미사리 카페 등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로서 그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오늘도 기타의 기초를 연습하며 컴퓨터를 통하여 음악을 연구하고 많은 책을 읽으며 인문적이고 예술적 체험을 함으로써 그의 음악의 격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노력은 '가나다라', '토함산'과 같은 국악적 요소가 짙은 음악뿐만 아니라 미당의 시를 가사로 한 '푸르른 날', 최인호 소설가의 글을 가사로 한 '밤 눈' 등 주옥같은 곡들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참새와 허수아비'와 '담배가게 아가씨' 이후 더 이상 발표는 하고 있지만 미발표곡 1,000여 곡이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명곡 '왜 불러'는 시대와 대중들에 의하여 암울했던 시대를 견디게 해주는 메타포로서 받아들여졌고 그는 아직도 자신의 어릴 적 호칭을 따서 이름 지은 미사리 카페에서 매일 밤 10시에 라이브 콘서트를 하며 영원한 가객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에게 음악은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재능은 어떤 분야에 대한 관심일 뿐이라고. 재능이 발아되어 개화하는 것은 끝없는 기초 연습과 반복적인 숙달 훈련에 의한 것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