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지려 하기 전에(7)최종회 - 단편소설

by 하기

7


정화가 행방불명됐다. 아니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여행이 끝나고 정화의 핸드폰으로 계속 통화를 시도했지만 정화는 받지 않았다. 강원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현실이 아닌 꿈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주변에 현실적 증거가 너무 많이 있었다. 기주와 같이 서울로 간 정화의 친구, 미정이가 있었다.

“기주야. 정화가 전화를 안 받는데 미정 씨에게 연락 좀 해볼래.”

“그래. 내가 한번 연락해볼게.” 기주는 대답했다. 점심을 먹고 기주가 나를 불렀다. 기주는 내 얼굴을 보고 눈치를 살피다가 한숨을 살짝 쉬었다. 그 모습이 답답해 나는 기주에게 다그쳤다.

“미정 씨에게 전화해봤어.”

“응. 전화했는데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어보던데. 정화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그래. 정화 씨도 같이 온대?”

“아니 미정이만 오는 것 같아. 회사 앞 그린호프에서 치킨에 맥주 한잔 하자. 내가 살게.” 기주는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퇴근시간까지 나는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예감은 미정을 만나는 순간 현실이 되어 나를 점점 미궁에 빠지게 만들었다.

미정은 종로에 있는 미용실에서 청량리에 있는 우리 사무실 근처로 전철을 타고 왔다. 미주상가에 있는 사무실에서 좀 떨어진 그린호프에 기주와 함께 들어오는 미정의 표정이 나를 보자 어두워졌다.

그날 미정이가 나에게 전한 정화의 사연은 나를 늪에 빠진 느낌으로 몰아갔다. 정화는 어릴 때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에 도망치듯 이혼을 한 후 아버지와 단 둘이 서울 망우동에 있는 연립주택 옥탑에 월세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정화를 때리며 이혼한 아내에 대한 화풀이를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했지만 아버지가 진 빛이 많아 옥탑방 생활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생활하였다. 그런 아버지가 최근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다가 동부간선도로에 실수로 들어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말을 하며 미정은 나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장례를 치른 후 오랜만에 저와 여행을 떠났다가 윤기 씨를 만나게 된 거예요. 정화는 아버지의 보증 채무에 연대채무자로 걸려 있어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 거 에요. 그래서 남자를 만날 형편이 아니에요. 아마 앞으로도 윤기 씨를 만날 생각은 없을 거 에요.”

“나한테 솔직히 말했으면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정화는 윤기 씨와는 한여름밤의 꿈같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하네요. 그리고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미정은 나에게 작은 종이가방을 건네주었다.

“정화가 윤기 씨에게 주라고 한 거 에요, 한 번 열어보세요.”

하얀 상자를 열자 목걸이가 있었다. 내가 선물한 하트 모양의 펜던트 목걸이였다. 나는 다시 미정에게 정화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였지만 미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 에요. 저는 정화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윤기 씨 어른답게 상황을 받아들이실 거라고 믿어요. 그럼 이만.”하고 미정은 호프집을 나섰다. 기주도 미정과 함께 나갔다. 혼자가 된 나는 맥주 대신 소주를 시키고 연거푸 술을 마셨다. 미정을 바래다주고 온 기주가 다시 돌아와 나에게 말했다.

“술 마시고 잊어버려. 정화 씨도 많이 괴로워하는 것 같아. 순수하고 좋은 사람인데 자기 때문에 상처를 준 것 같다고. 그래도 이쯤에서 끝내는 게 너한테 좋을 거래. 미정 씨한테 들은 얘기야.”

기주의 말은 나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는 계속 소주를 마셨고 술에 떡이 된 나를 기주가 집까지 데려다 주어 나는 귀가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자 기주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피서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요즘 윤기가 이상해졌어. 못 마시는 술을 매일 마시고. 너 좀 아는 거 없어?”

기주는 불편해하며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늦었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다. 우리들의 환상 같았던 그해 여름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정화와는 그 후로 만날 수 없었다. 기주가 몇 개월간 미정과 사귀었지만 성격차이로 헤어지고 사실상 전화번호를 바꾼 정화를 만날 수 있는 방법도 없어졌다. 나는 몇 개월간 우울한 나날을 보냈지만 사촌 여동생의 소개로 여동생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던 영주를 만나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었기에 정화와의 일은 한여름밤의 꿈같은 로맨스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이 왔다.

해진이 점심을 먹고 동규와 함께 나에게 왔다. 커피 한잔을 하자기에 우리는 믹스커피를 한잔씩 타서 옥상으로 갔다. 담배를 한 대씩 피우며 커피를 마셨다.

“윤기에게 말해도 되겠지 동규야.” 해진은 동규를 보며 동의를 구하듯 물어보았다.

“무슨 얘긴데. 빨리 말해 뜸 들이지 말고.” 나는 해진을 보고 재촉했다.

“그래. 어차피 헤어졌고 지금 영주 씨랑 잘 만나고 있으니까. 얘기해도 될 것 같다. 사실 우리 어제 정화 씨 만났어. 어디인 줄 아냐. 강남에 있는 룸살롱에서. 화장을 많이 해서 처음엔 잘 몰라봤는데. 내 파트너도 아니었고 거래처 사람들도 있고 해서 아는 척 안 했는데 정화 씨가 맞는 것 같아. 정화 씨도 엄청 불편해하는 게 보이더라고. 나중에 복도에서 잠시 얘기 나누었는데 사는 게 힘든 것 같더라고. 빚 때문에 회사도 못 다니고 결국 술집까지 전전하는 것 같아.” 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담배를 한 가치 더 피웠다. 하조대 해변에서 정화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다음날 혼자 강남에 있는 룸살롱을 찾아갔다. 작년에 수동 카메라로 찍고 인화한 정화의 사진과 정화가 나에게 돌려준 목걸이가 가방에 들어있었다. 들어가지는 않고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며 거리를 서성였다. 사진과 목걸이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지만 정화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화를 보지 않고는 뭔가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마음이 흔들리던 순간 검은색 미니스커트에 어깨 쇄골이 다 드러나는 하늘색 니트를 입고 술집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는 정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취객들은 술에 취해 정화를 안고 뽀뽀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정화는 간신히 그들을 떼어내고 하이힐을 신고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정화가 다시 룸살롱으로 들어가고 몇 분 후에 나도 따라 들어갔다. 정화의 사진과 목걸이가 든 봉투를 카운터에 있는 웨이터에게 준 후 정화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웨이터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내가 지갑에서 몇만 원을 꺼내 쥐어 주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룸살롱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거리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레코드 가게에서는 가는 여름이 아쉬운지 쿨의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그래 내게 주었던 사랑 그보다 더 행복한 건 내겐 없었어

그래 나 이젠 널 떠나보내 줄게 더 이상 슬퍼지려 하기 전에”


https://www.youtube.com/watch?v=Ywei9QIg6sE (쿨 슬퍼지려 하기 전에 감상하기)

매거진의 이전글슬퍼지려 하기 전에(6) - 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