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늑대들의 밤

(단편소설) 솔로헤븐 - 3

by 하기

레이와 늦게까지 있다가 집까지 바래다 주고 자정이 지나 집에 들어간 나는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늦게까지 단잠을 잤다. 나의 단잠을 깨운 건 원숭이번개에서 만난 달령의 전화였다.


“하기, 어제 잘 들어갔어?”

달령의 물음에 난 “응, 잘 들어왔어. 술이 덜 깨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네. 너는 어때. 잘 들어갔지?”

“응, 그런데 오늘 시간 어때? 지금 월미도에서 축제 중인데 같이 보러 가자.”

“그래, 나도 오늘 별다른 약속 없으니 3시쯤 월미도에서 만나자.”하며 나는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 약속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3시에 월미도에 도착하니 달령이가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혹시 바람맞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달령의 전화가 왔다.


“하기, 미안해.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갑자기 차가 막혀서 시간이 많이 걸리네.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럼, 천천히 와. 나 월미도 축제 구경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월미도 축제를 구경하며 바다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등을 쳤다. 달령이었다. 달령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하얀 모자를 써서 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느껴졌다. 우리는 월미도 축제를 구경하고 놀이기구도 타며 시간을 보냈다. 태양이 질 무렵 바닷가는 붉은 색 노을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색에 취해 이 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저물어가는 월미도의 노을을 감상하였다.


근처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해변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원숭이 모임 회장인 장군이와 죠커랑 한번 시간내서 놀러와.”

“그래, 한번 인천에서 원숭이 모임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하기 개들이 너 대개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 알아?”

“아니, 왜?”

“네가 솔로헤븐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대나. 자기들이 만나 달라면 안 만나줘도 너는 항상 옆에 여자가 많은 것 같대. 솔직히 그래서 나도 네가 어떤 앤지 궁금했어?”달령의 말은 의외였다.

“5년간 사귄 여자한테 차여서 솔로헤븐에 가입한 내가 무슨 매력이 있다고...”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너, 인라인도 타고 음악방에서 디제이도 한다며...그리고 영화음악을 소개하며 영화에 대한 비평을 하는 데 거의 프로솜씨라고 하던데. 여자들은 감성적인 면에 약해서 글 잘 쓰고 음악 많이 아는 너한테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아. 거기에 인라인까지 잘 타니 인기가 많지. 후후.”

“그래 봤자지. 뭐. 결혼해 달라면 다들 도망칠 건데. 말단공무원에 월급도 뻔하고. 너도 내가 청혼하면 도망갈 걸. 크크.”나는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달령도 커다랗게 미소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운 건 신사동세우관 직원들 중 인라인을 잘 타는 직원이 있어 그와 함께 이촌동 한강공원 인라인 스케이트장에 가서 타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되었다. 혼자 사는 적적함에 주말에 인라인을 타고 한강변을 달리면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솔로헤븐에 가입하면서 인라인 번개를 몇 번하고 초보자들에게 자세와 주법을 가르쳐주면서 하기가 인라인을 잘 탄다는 말이 회원들에게 알려졌다.


솔로헤븐사이트에는 음악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글을 올리고 음악을 링크하는 일도 퇴근 후에 나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주로 영화음악과 인디밴드의 음악, 올드팝 등 내가 즐겨듣는 음악이 주류였는데 가끔씩 영화음악과 관련된 영화평 등을 사이트에 게시하면서 음악방 디제이역할을 한 것도 사이트 회원들에게 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데 일조를 했다.


“하기 형 내일 토요일 이촌동 인라인스케이트장에서 번개하는 거 잊지 않으셨죠?”인라인방 총무 기동이가 채팅방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럼. 기동이 내일 인라인 스케이트장에서 보자.”

내가 대답하자 채팅방에 있던 몇몇 여성회원들이 관심을 가진다.

“저 아이디가 민피디인데 저도 인라인 좋아하는데 내일 번개 나가도 되나요?”

“그럼요. 신규회원들 환영합니다.” 기동이가 반가운 듯 대답한다.

“난 음악방에 음악신청 들어온 게 있어서 음악 좀 링크할게. 민피디님 방송국 다니시나 봐요. 아이디가 피디라...”

내가 물어보자 민피디는 “방송국은 아니고 케이블티브이 쪽인데...”

“그럼. 기동이, 민피디님 모두 내일 봐요.”라고 말하고 나는 채팅방을 빠져 나왔다.


다음날 한강둔치공원 내 이촌동 인라인스케이트장에 솔로헤븐 회원 10명정도가 모였다. 신규회원들 몇이 있어 자기소개 겸 인사를 했다. 그 중에서도 민피디는 늘씬한 키에 진청색 스키니진 속 몸매가 육감적으로 탄탄하여 남자회원들의 눈길을 제일 많이 받았다. 기동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 민피디의 강습을 자처했다. 신규회원들 강습을 기동이에게 맡기고 난 기존 회원들과 한강변방향으로 로드를 나갔다.


길가에는 가을이라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눈으로 즐기고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로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기. 애인 없어? 주말에 솔로헤븐 모임만 나오고...”돌싱인 스칼렛누나가 나에게 물었다.

“솔로헤븐이 애인이죠. 주말엔 주로 번개하느라 애인 사귈 시간도 없네요. 흐흐.”

“그래도 언젠가는 결혼해야지. 하기도.”

“아직은 생각없는 데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죠. 스칼렛누나 저 먼저 나갑니다. 따라오세요.”하고 나는 다리를 저으며 스케이트의 속도를 올렸다.


인라인번개 후 우리는 뒷풀이로 근처의 돼지갈비집에서 갈비를 먹고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잔했다. 중간에 회원들이 대부분 먼저 가서 마지막엔 방장인 나와 총무 기동이, 신규회원 민피디만 남았다. 강습을 통해 둘이 친해졌는 지 기동이와 민피디는 술이 취하자 둘이서 다정한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분위기 상 자리를 피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동아. 난 요 앞에서 누구 만나기로 해서 먼저 갈게. 민피디님 오늘 반가왔어요. 담에 봐요.”하고 나는 둘을 남겨 놓고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뜨긴 했지만 토요일밤이라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해서 근처에 집이 있는 등산방 콩쥐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콩쥐 누나. 누나 집근처인데 차 한 잔 안하실래요? 토요일 밤은 혼자 보내기 싫어.”나의 넋두리에 콩쥐 누나는 “하기, 나 지금 올림픽공원 산책 중이니 석촌호수 쪽으로 올라와. 같이 산책하자.” “오케이, 그럼 바로 갈게요.” 나는 누나의 오뚝한 콧날과 캔디머리를 떠 올리며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석촌호수 산책길에 가자 콩쥐누나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콩쥐누나 옆에는 등산방 막내 시인이 있었다.

“하기형, 오셨어요. 저도 오늘 약속이 없어 콩쥐 누나랑 산책 중이었어요.” “하기, 방가방가. 오늘 등산방 남자들 왜 그래. 이따가 사일런스님이랑 청산님도 이리로 오기로 했어. 모두 바람맞고 나한테 화풀이하러 오는 거 아니지. 크크.”하며 콩쥐 누나는 웃었지만 마음이 찔린 나는 표정이 굳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사일런스형과 청산형이 오고 우리는 근처 호프집으로 가서 맥주를 한잔 마시며 치킨으로 마음 속 허기를 채웠다. “그럼, 남자들끼리 한잔들 더 하세요. 저는 집에 부모님이 와 계셔서 먼저 갈게요.”하고 콩쥐 누나가 나가자 작심한 듯 사일런스형이 먼저 말을 꺼낸다.


“하기, 콩쥐는 건드리지 마라. 넌 젊으니까 아직 기회가 많겠지만 난 내일 모래 오십이야. 콩쥐한테 맘이 있어 정성을 들이고 있으니 나에게 양보해. 청산님은 오렌지가 있으니...시인 넌 별 뜻 없지?” 무스탕 컨버터블을 몰고 다니며 강남 오렌지 족 냄새를 풍기는 시인은 “그럼요. 전 누나가 자꾸 놀러오라고 해서 한번 와 본 거에요.”라고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토요일 밤은 깊어가고 꺼져가는 맥주거품 속에 외로운 늑대들의 밤도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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