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솔로헤븐 - 4
솔로헤븐에는 각종 번개가 많았지만 내가 즐겨찾는 모임에는 공연번개도 빠질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공연을 혼자 볼 수도 있지만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회원들과 같이 보면 단체할인도 가능해 좋아하는 공연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공연 후에 솔로헤븐 회원들과 뒷풀이를 하며 공연에 대한 감상도 하고 여흥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덤이었다.
솔로헤븐 고문단인 파인님이 공연방에 공지를 올린 정태춘,박은옥 콘서트는 인기가 많아 많은 회원들이 번개에 참석했다. 백 여 명 가까운 회원들이 공연에 참석하자 콘서트는 마치 솔로헤븐 정기공연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연 중에 가수 정태춘이 오늘 많은 동호회원들이 참석하신 것 같은 데 어떤 동호회냐고 앞에 앉은 파인님에게 물어보았다. 파인님이 “솔로모임입니다.”하니까 정태춘가수는 “부부공연인데 솔로모임이라...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하고 웃으며 말해 분위기가 약간 썰렁해졌지만 이어서 떠나가는 배를 부르는 부부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우리는 공연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하는 구절에 솔로의 애잔한 감상을 실어서 회원들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다음날 강남역 L사 본사사옥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하는 것으로 우리는 원숭이 번개를 하였다. 나는 레이와 제인과 함께 자리를 잡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10만원이나 하는 티켓값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원숭이모임 동기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공연관람 후 우리는 선녀와나무꾼 주점으로 옮겨 뒷풀이를 하였다. 그곳에서 죠커는 나에게 “하기, 너 국세청 하위직 공무원이라며...그런데 여기 회원들에게 고위직인 것처럼 말하여 인기가 있다고 하던데...”라고 말하며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난 한 번도 고위직이라 말한 적 없는 데...너가 넘겨짚고 말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니야?”나는 약간 화를 내며 반발하였다. 원숭이모임 회장인 장군이가 “너희들 왜 그래. 분위기 안 좋아지게...자자 술 마시고 둘이 화해해.”하며 말하였지만 장군이도 왠지 죠커편인 것 같아 나는 몸이 안 좋아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주점을 나왔다.
전철을 타기 위하여 강남역에 도착하니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하기, 나 레이야. 이따가 세이부 카페로 갈테니 거기서 기다려. 같이 나가기 뭐해 난 좀 이따가 출발할게.” 레이의 메시지였다.
난 세이부카페로 가서 잭다니엘 위스키를 시키고 얼음을 잔에 채워 술을 탄 후 혼자서 홀짝거렸다. 카페에는 이글스의 호텔캘리포니아가 울리고 있었다. 구석자리에 앉아 창 밖을 보니 빗방울이 맺히는 것 같아 레이가 비를 맞는 것 아닌가하고 걱정하는 찰나에 문을 열고 레이가 들어왔다. 다행히 비를 맞지는 않았다. 레이가 익숙한 듯 내 옆으로 앉았다.
“아까 죠커의 말에 기분이 많이 상했어?”모히토 칵테일을 마시면서 레이가 물었다.
“아니, 예전부터 죠커하고 장군이가 나를 많이 견제하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오늘은 확실하게 내 기분을 표현하려고 불쾌감을 표시한 거야.”
“그랬구나. 하기 넌 겉으로 보기보단 마음에 강단이 있는 것 같아. 오늘 느꼈어. 흐흐.”
“그래서 실망했어?”나는 물었다.
“아니 남자로서 더 끌리는 걸 크크. 우리 내일 홍대에 크라잉넛 공연 보러가자. 제인이 친구들이랑 보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못 간다고 나보고 너랑 같이 가라고 줬어. 좋은 친구지.”
“그래, 나도 그런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다. 하하.”하며 우리는 내일의 공연을 기대하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만은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연인들인 것처럼...
솔로헤븐에서 가장 인기있는 번개 중 하나는 마라톤번개였다. 중년으로 접어든 회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건강이었고 마라톤은 건강유지를 위한 가장 좋은 운동으로 인식되어 인기가 많아졌다.
마라톤번개를 이끈 것은 58년 개띠모임의 파인형과 에밀리님이었다. 두 분은 솔로헤븐 창립멤버로 따르는 후배들도 많고 모임 내 고문역할을 하고 있어 마라톤 번개를 주최하면 참석자도 많았다. 나도 등산방 콩쥐누나의 추천도 있고 해서 마라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로 올림픽공원에서 연습을 많이 하였는데 인라인번개도 올림픽공원 광장에서 많이 주최되어 우리는 연습을 같이 하게 되었다.
연습 후에는 저녁을 먹고 회식을 하며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모든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식적 번개보다도 비공식적인 회식시간에 솔로헤븐과 관련된 뒷얘기도 많이 듣게 되고 인간적인 친밀감도 돈독해졌다. 회식을 하고 나서는 주로 노래방에서 2차를 많이 했는데 연애감정이 생겨나는 건 주로 노래방에서였다.
그날도 나는 레이와 블루스를 추며 연한 향수 냄새를 느끼고 있었다. 파인형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며 “좋을 때야. 난 연애해본지가 10년은 더 된 것 같아.”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면 마라톤 동지인 에밀리누나가 “갑장, 연애가 그렇게 고프면 나랑 연애할까?”하며 파인형님을 은근히 떠보는 말을 한다.
“가족끼리 무슨 연애야. 에밀리씨랑 난 솔로헤븐 가족 아닌가. 하하.”하며 호탕하게 웃는 파인형님의 표정이 왠지 쓸쓸해보였다.
다음 날 퇴근 후 솔로헤븐에 접속하니 운영자인 헤븐님의 공지가 팝업되었다. 솔로헤븐 정기모임 공지였다. 의무참석자로 각 방장과 고문단의 명단이 떠있었고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참석하여 의견교환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인라인 방장으로 참석하라는 요청이 있어 자연스럽게 운영진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약속시간인 7시30분에 강남역 선녀와나무꾼에 도착하니 고문단인 파인형, 스칼렛누님, 에밀리님, 등산방장 져니형, 영화방장 디렉터님, 레저방장 마린님 등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신규회원이 몇 와 있었는데 그 중 영춘이라고 자신의 아이디를 소개한 회원이 그날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바짝 마르고 키가 큰 그는 쉰 목소리로 목소리론 나이보다 늙어 보였지만 얼굴은 작고 귀여워 나름 매력이 있는 외모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초조한 듯 얘기를 계속 했다.
나는 이미 번개를 통하여 대부분 아는 얼굴이라 인사를 하고 운영자인 헤븐님은 처음 보게되어 정식으로 인사를 하였다. “운영자님, 하기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하기님 활약상은 잘 보고 있어요.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이트를 위해서 힘써주세요. 하하.”하며 헤븐님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헤븐님,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을 연상했는데 이렇게 이쁜 여성분인 줄은 몰랐네요.”라고 나는 운영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은근히 아양을 떨었다.
“고문단분들이랑 1차회의를 했는데...방장님들도 알다시피 우리사이트는 솔로들을 위한 사이트에요. 결혼이나 남녀간의 만남을 위한 사이트가 아닌데 최근 그런 목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좀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물론 우리 사이트에서 남녀간의 연애가 금지된 건 아니에요. 그런데 결혼을 목적으로 한 만남은 아니라고 봐요. 우리 사이트의 개설취지에도 맞지 않고. 이에 대하여 방장님들 의견은 어떠신가요?”라고 묻는다.
“그럼요, 저도 결혼은 반대에요. 전 강원랜드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많은 여자들과 연애하기 위해 이 사이트에 가입했어요. 결혼은 안됩니다. 힘들게 번 돈을 한 여자를 위해 올인하는 건 인생의 낭비에요. 저는 최대한 많은 여자들에게 저의 부를 베풀고 죽을 겁니다.” 방장도 아닌 영춘이 대답했다. 순간 많은 여자 회원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내 사주에 외로울 고자가 3개나 있어 나는 솔로를 벗어날 수 없는 팔자인가봐. 하지만 남녀간의 만남을 억지로 조절할 수 없다고 생각해. 사이트에서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까지 우리가 억제할 수는 없지.”58년 개띠로 솔로헤븐 창립멤버인 파인님이 한마디 했다.
“그래도 결혼은 아니라고 봐요. 난 10분만 주어지면 어떤 남자도 유혹할 자신이 있지만 결혼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이 사이트를 떠나 듀오나 결혼전문사이트로 가야한다고 봐요.”하며 파인님과 동갑인 에밀리님이 말한다.
“난 솔직히 모르겠어. 난 이젠 여자로서 죽음과 같은 폐경이 될 나이인데...이 사이트에서 젊은 남동생들 만나면 생기도 생기고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 사실이야. 그런데 그 어리고 이쁜 남동생들이 짝 찾아 모두 떠나면 재미없는 것도 사실이지.”스칼렛누나다운 발상이었다.
우리는 다음달 솔로헤븐 1박2일 캠프행사에서 이 문제를 회원들과 다시 한번 논의하기로 하고 2차로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인님이 부르는 카스바의 연인을 반주로 스칼렛누나와 나는 블루스를 추었다.
“하기, 오늘 밤 어때?”하며 스칼렛누나는 손으로 나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누님, 왜 이러세요.”나는 엉덩이를 빼며 주춤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스칼렛누나의 이런 식의 장난은 사이트의 젊은 남자라면 안 당해본 사람이 없고 별다른 악의가 없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노래를 다 부르고 혼자 앉아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파인형의 표정 속에 진한 고독이 운명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V1trrRTXB0 (정태춘,박은옥의 떠나가는 배 감상하기)
https://www.youtube.com/watch?v=YV2wPnWuPds (크라잉넛의 밤이 깊었네 감상하기)
https://www.youtube.com/watch?v=bbZT25qQnMw (윤희상의 카스바의 여인 감상하기)
https://www.youtube.com/watch?v=sWcPBQ2qe6E (이글스 호텔캘리포니아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