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것은 문장의 부정이며 음악, 그것은 반(反) 언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51p, 민음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군데라는 체코에서 음악학과'작곡을 공부했다고 해요. 작가의 아버지도 체코의 유명한 음악가였답니다. 음악에 아주 진심인 작가였군요. 문학이 이성적이라면, 음악은 직관적이고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바로 느낄 수 있는 영역이죠.
음악은 언어의 한계를 넘는 예술임을 강조했다고 하는데요. 음악과 문학을 연결시킨 그의 작품성에 놀라게 됩니다. 글만 읽었을 때와 책 속에 소개된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아주 다릅니다. 6월 북클럽 선정도서라서 미리 재독 해보고 있어요.
프란츠에게 음악은, 도취를 위해 창안된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다. 소설이나 그림을 통해서 혼미해질 정도로 도취되기 어렵지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베르토크의 두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면 취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49p
읽다가 또 멈췄습니다.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은 또 뭘까?
니체가 말했더군요. 아폴론적 아름다움은 이성적 중심의 질서, 조형미를 말하고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은
감성 중심의 광기, 황홀, 혼돈, 해체, 창조성을 표현하죠. 그래서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에 가깝다고 했군요.
책에 소개된 음악을 안 들을 수 없겠죠. 음악을 들으니 프란츠의 의식을 엿볼 수 있어요. 이 음악을 그냥 지나쳤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부분이었어요. 베르토크의 두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혼돈, 해체, 광기, 황홀이 느껴집니다.
도취될 만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블로그 쓰기 전, 블로그 쓰면서 계속 듣고 있어요. 비틀스의 음악은
많은 분들이 아시니 언급하지 않을게요. 위 음악을 들으면서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이 뭔지 경험했습니다.
제가 쓴 전자책 '나는 오감으로 읽는 여자'에서도 책에서 음악이 나오면 꼭 들어보라고 썼습니다. 글의 분위기를 아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블로그 하단 링크 참고하세요~^^)
그에게 있어서 음악을 해방을 뜻했다. 음악은 그를 고독과 유폐, 도서관 먼지로부터 해방하며 육체의 문을 열어 줘서 영혼이 빠져나와 타인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사비나가 그와 더불어 이러한 춤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50p
프란츠에게는 음악이 해방이었지만 사비나에게는 그렇지 못했어요. 사비나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청년 작업장에서 확성기에서 들리는 음악, 침대, 화장실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풀어놓은 개 떼 같았다고 했거든요.
공산주의 시대의 음악적 야만성을 고발합니다. 음악을 시간 내어 우아한 공연자에서 식사 후 좋은 사람들과 듣는 것과 작업장에서 소음처럼 좋지 않은 확성기에서 들리는 음악은 차원이 다르겠죠.
갑자기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들었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장소도, 스피커도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그리움, 자유를 향한 동경을 느낀 노래였어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인데 아주 대비됩니다. 감옥에서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그것도 오페라 곡이라뇨. 음악만으로도 분위기를 상황을 연출할 수 있기에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극적으로 사용합니다.
밀란군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음악과 연관해서 생각을 확장할 수 있어서, 새로운 밀란 군데라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어요.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밀란군데라의 고민입니다.
문학이 음악처럼 될 수 있을까?
문학이 음악처럼 해방될 수 있을까?
-밀란군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