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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자반 May 31. 2023

끝없는 레이스의 한복판에서

수학과 대학원 일기


대한민국 자영업자들이 3년을 넘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자영업자들의 평균 수명은 3.7년에 불과하다. (중략) 경기 침체도 한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자영업자들의 경우 프로 정신이 약하거나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 없이 오로지 돈벌이만을 위해 장사한다는 뜻이다. 품질을 개선하거나 서비스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치열하지 않다.  

대충 장사를 하다가 잘되면 가게를 팔아 현금을 챙긴 뒤 편하게 살 방도를 생각한다.

장사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금방 다른 업종으로 바꿔버린다.

이러니 몇 년도 채 못 버티고 금방 죽는 슬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책 [약자들의 전쟁법] 발췌



수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첫 몇 주는 열의가 넘쳤다. 

나에게 좋은 기회를 준 학교에 감사하고, 나를 선택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했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교수님께 직접 수업을 받을 수 있음이 기뻤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첫 과제의 점수를 정확히 14점 받기 전까지 말이다. 

더 문제인 점은, 몇몇 다른 학우들은 만점인 6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쩌면 너무 많이 뒤처져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언제나 뼈아픈 일이다.


두 번째 과제가 나왔다.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앞 자릿수는 1이었다. 

세 번째 과제가 나왔다. 

아침에는 투덜거리며 일어난다. 몸은 무겁고 피곤해 정말 죽을 것 같다.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학교로 간다. 

몸은 학교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60점을 가까이 맞은 B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며 무리 없이 술술 풀어가는 모습이. 

세 번째 과제에서 반드시 반등하고 싶은데 마음만 앞선다. 

내 미래가 너무 걱정되고 불안하다. 12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는 순간은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가만히만 있어도 괴롭다.

나는 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 B학생처럼 잘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자퇴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것이 나을까.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학원생들도 한 번씩은 겪었을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고통과 욕망 사이의 시계추이다, 그런 말과 같이, 어떠한 욕망을 하나 이루면 자꾸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또 고통을 받는다. 

원하는 대학원에서 원하는 교수님께 지도받을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 욕망을 이루고 나니 B학생처럼 뛰어난 학생이 보이고, 저 사람처럼 잘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나를 또 괴롭게 만든다.

내가 B학생처럼 뛰어나게 되면 어떨까? 세상은 넓고 잘난 사람은 더 많다. 그다음으로는 어느 저널에 논문을 올린 학생을 부러워하고, 또 고통받고, 언젠가 학위를 받고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항상 다음 경지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저주받았는가. 끊임없는 욕망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나라는 배는,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결국 어디로 가는가.



수렁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 그랬듯 나는 책에서 답을 찾는다. 


아무 생각 없이 읽던 책들이 나에게 답을 준다. 

맨 앞에서 발췌한 자영업자의 이야기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야기에 나온 자영업자는 돈벌이만을 위해 장사하기 때문에 결국 가게를 접는다.

돈을 위해서 장사하기 때문에 매출이 잘 안 나오면 괴롭고, 또 매출이 잘 나오는 옆 가게를 보면서 배가 아플 것이다. 

나는 왜 대학원에 왔는가,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나는 왜 이 길을 걷는가.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에 살기 위해서,

위대한 수학자가 되어 난제를 풀고 사회적 명성을 얻기 위해서?

다 틀렸다.

그런 생각으로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어느 순간 나는 틀로 찍어낸 듯이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영업자의 경우에는 돈이, 나의 경우에는 뛰어난 스타 수학자라는 명성(돈)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스타 수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기 때문에 실적이 잘 안 나오면 괴롭고, 또 실적이 잘 나오는 B학생을 보니 배가 아프고 또 괴로운 것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고민이 많았다. 우리는 왜 끝이 없는 레이스를 해야 하는지.

왜 끝이 없는 레이스에서 계속 달리며 고통받아야 하는지.

답은 정말 간단한 곳에 있었다.

끝없는 레이스에서 고통받지 않는 방법은, '달리기'라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에게 있어서 '달리기'가 무엇일지 선택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글쓰기고, 요리일 수도 있고, 자영업일 수도 있고, 수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내 '달리기'로 수학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 레이스의 완주까지, 레이스의 끝이 어딘지 보며 망연자실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린다는 그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서,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반평생 종사하면서, 하루의 2/3이 넘는 시간을 하기 싫어 죽상인 상태로 지낸다면 그것보다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의식적으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엄청난 것을 배울지 의식적으로 기대했다. 

일주일마다 있는 강의 수업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고, 에너지를 받는 것만큼 보람찬 일이 없었다. 연휴 때가 오면 그 며칠 동안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한 과목만을 집중하여 파 보기도 했다. 이전에는 늘어져서 끝내지 못했던 것들을 착 착 해 나갈 때, 왜 천재는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즐기는 사람은 지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릴지라도 천재를 이길 수밖에 없다.


생기가 넘치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모여든다. 왜 사람들을 대할 때 웃으라 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사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는 웃는 것까지 신경 쓰고 난리네. 네가 내 상황이 되어봐라 웃음이 나는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과정을 즐기니 웃음이 난다. 웃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모여든다. 죽상을 하고 '교수님 저 못하겠어요, 저 어떡할까요.'라고 말하는 것과 열정적인 눈빛으로 '아직 부족하지만 총력을 다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어떤 학생을 더 곁에 두고 키워보고 싶을지는 자명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나는 숲으로 갔다.
삶을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였다.
나는 인생의 정수를 마음속 깊이,
그리고 끝까지 맛보며 살고 싶다.


인생의 정수를 마음속 깊이, 그리고 끝까지 맛보며 살고 싶다. 



나라는 배는, 인생이라는  어디로

나라는 배는,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결국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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