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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자반 Jun 02. 2021

대입, 그리고 능력주의

책 리뷰)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센델

오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민한 주제 중 하나를 꺼내보려고 한다: 대입.

대한민국에 사는 청년, 혹은 청소년이라면 누구든 겪어봤을, 그리고 겪고 있는 이야기이다.

대학에 진학하고 4학년이 된 지금,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내 학창 시절의 케케묵었던 기억을 꺼내게 만들었다. '공부'만 잘하면 뭐든 가능했다고 믿었던 세상. 그리고 지금.



나에게 있어 공부와 보상에 대한 첫 기억은 바로 이것이다.


"이번 학기 전교 3등 안에 들으면 엄마가 너 좋아하는 연예인 앨범 사줄게! 응? 그러니까 제발 공부 좀 해라!"


중학교 2학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크게 시험에 스트레스받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 되었든 나쁘지 않은 성적이 나왔으므로.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고 성적이 점점 떨어져 가자 부모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성적은 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내내 세세하게나마 하향곡선을 그려갔고 부모님은 점점 큰 보상을 걸었다. 3만 원 상당의 앨범부터 내가 갖고 싶어 했던 화장품과 귀걸이, 그리고 오십만 원을 웃도는 아이돌 콘서트까지.


"진짜? 진짜 나 콘서트 보내줄 거야?"

"그럼! 우리 딸이 전교 3등 안에 든다는데 엄마 아빠가 못해줄 게 뭐가 있니?"


결국 콘서트는 가지 못했지만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기억이었다.


공부를 잘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뭐든지 할 수 있구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평균 몇 점, 전교 등수 몇 등. 그것에만 집중했던 중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고등학교 생활은 신경 쓸 것이 매우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대입. 진정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얘들아, 웃긴 거 하나 알려줄까? 너네 지금 앉는 자리, 너네 등급이야. 맨 앞에 앉은 애가 1등급. 그 뒷줄이 2등급, 그다음이 3등급, 그런 식으로 가는 거지."


고등학교 1학년, 수학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 시절 수학만 수업하는 교과 교실이 따로 있어서 우리는 매 수학 시간마다 자리를 따로 맡고 앉아야 했다.

원래도 '앞자리 사수 경쟁'은 치열했지만 그날 이후로는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다른 반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재빨리 자리를 맡는 친구, 그런 친구를 '공정'하지 않다며 욕하는 친구.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들이 맨 앞줄 책상의 앞, 그러니까 바닥에 앉기 시작한 때가.


수학실의 자리는 정말 등급처럼, 정확한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일찍 가서 자리를 맡으려 해도, 운이 나쁘면 자리가 없었다.

으레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앞자리에 앉은 친구와 앞자리에 앉지 못한 친구들끼리.

한낱 수학실의 자리가 실제 등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론 작은 연관성은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짜 등급이라도 되는 양, 더 목을 매었고 더 집착했다.



놀랍게도 방금 두 가지 사례가 '공정하다는 착각'의 핵심 아이디어를 적절히 설명해준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만큼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첫째, 완벽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학실의 자리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사회적 성공의 인원은 정해져 있다. 어찌 되었든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수학실에 달려가서 자리를 맡으려 했는데, 그날따라 선생님께서 수업을 안 끝내 주신다. 그래서 빠른 달리기 실력이라는 선천적 재능을 가진 친구가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달리기가 빠르지 못하다.


마이클 센델은 지적한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 혹은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CH1]-능력주의의 맹점 中 

결국 이 선천적 재능이라는 것도 운이고, 그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도 운이다. 수학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학교에 다녔더라면 빠른 달리기 실력이라는 재능은 공부에 그다지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 '운'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에 따른 겸손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능력주의는 사회적 단절을 불러오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눈다. 승자에게 자신의 성공에 대한 오만을, 패자에게 분노와 좌절을 가져다준다.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 믿는 승자에게 "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패자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수학실의 예시에서 보자면, 앞자리 친구들과 뒷자리 친구들의 싸움이다. 뒷자리 친구들은 뒷자리에 앉고 싶어서 앉은 것이 아니다. 게으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날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 상황, 앞자리 친구가 한마디 말을 던진다.


"그러게 일찍 일찍 성실하게 다녔어야지, 네가 앞자리에 못 앉은 건 네가 굼뜨게 행동한 것이지 누굴 탓해? 빨리 오면 앉을 수 있다니깐?"


능력주의는 불가항력적인 요인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공과 실패를 교묘하게 비튼다. 성공할 만해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할 만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그 둘 사이의 골짜기는 더욱 깊어져 가며 사회는 분열되고 만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 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결론] p.353 中



셋째, (능력주의적 관점에 따른) 승자와 패자 모두가 결론적으로 상처 받게 된다.


이쯤 되면 그 시절 우리 모두가 왜 수학실의 앞자리에 집착하였는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그 자리가 실제 등급을 보장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실제 등급에 집착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지만 지면의 문제로 적지 않는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훨씬 더 논리 정연하게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역시 능력주의의 폐해 중 하나이다.

능력주의는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을 불러일으킨다.


성공을 해도 내 덕이고, 실패를 해도 내 탓이다. 

대입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내가 무언가 부족한 탓이다.

그런데 명확하게 무엇이 부족했는지는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때 틀린 수학 하나가 문제였을까? 그때 수학이 딱 한 등급만 높았다면,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아니, 영어가 문제인가? 혹은 다소 낮았던 제2 외국어 성적?'


이러한 걱정은 청년들이 모든 것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학점 0. 몇 점, 토익 성적 10점, 인턴 경험과 자소서 한 글자까지.

패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승자가 되어도 온전하지 않게 된다.





사실 나는 능력주의 신봉자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하면 된다'라는 말에 가슴이 떨렸고 능력주의는 내 모든 노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무참히 깨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나를 짜릿하게 했던 이 책이.

나의 부족함과 오만을 인정하게 하고 나를 부끄럽게 했던 이 책이.




나의 글은 '공정하다는 착각'의 핵심 중의 핵심 아이디어만 담고 있으므로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많은 반론들에 대한 반박과 흥미로운 예시들, 그리고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는 능력주의의 대안까지. 지면이 허락지 못해 한번에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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