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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자반 Jan 09. 2021

모르는 것도 죄인가요?

절학 입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랜트

홀로코스트. 히틀러. 유대인. 20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이 일은 아주 유명하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고 난 후, 패전국인 독일에게는 홀로코스트(히틀러가 진행한 유대인 학살)의 주범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진행했던 중급 관리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며 그를 바탕으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아이히만이 누구든 간에 홀로코스트에 발을 담근 이상 무조건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을 무작정 처벌하기에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1. 아이히만은 '중급' 관리라는 점. (홀로코스트를 진행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관이 그저 시켜서 했을 수 있다.)


2.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가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성실한, 심지어는 정신적으로도 아무 이상이 없는 시민이었다는 점. (답답해진 판사들이 재판장에서 아이히만의 정신 검사를 진행했다.)


악의 평범성을 논의하는 이 책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문제는 2,3번이므로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대체 아이히만은 왜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답을 미리 말하자면 아이히만은 앞서 언급한 3가지 무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말할 줄 모른다. 생각할 줄 모른다. 그리고 판단할 줄 모른다. 히틀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으며 아이히만 자신도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먼저 말하기의 무능성. 유대인 학살의 초반부, 히틀러는 '언어 규칙'을 도입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 것 같은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살'이라는 단어를 '최종 해결책' 또는 '특별 취급'으로 바꿔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말 체계의 통상적인 효과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이 구호와 관용구에 쉽게 감염된 점은 그가 일상적 언어 사용을 하지 못한다는 점과 결부되어, 그는 '언어 규칙'에 대해 이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6장> 학살 中


쉽게 말하자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이 계속되다 보면 계속 눈을 가리고 지내게 된다는 것. 아이히만이 바로 눈을 가리고 있는 그 상태였다. 히틀러의 수뇌부는 이 '언어 규칙'에 아주 많은 공을 들였다. '특별 취급'이라 말하는 관리들이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보고 동정심 때문에 괴로워하자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에서 '나의 임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로 관리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말하기의 무능성이 생각의 무능성을 초래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 '언어 규칙'에 완벽히 동화되어 홀로코스트가 학살이 아닌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한 안락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너무나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이 문제에 관한 슬픈, 그리고 아주 불편한 진리는,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것이다.

<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 中




거의 1년에 다다르는 이 긴긴 재판은 아이히만의 사형선고로 끝난다. 비록 아이히만은 자신의 죄를 인지하지 못하였지만, 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즉 모르는 것도 결국엔 죄였던 셈이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15장> 판결, 항소, 처형 中


아이히만을 통해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경고'라고 생각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에는 우리 모두가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 특히 미디어 기술이 우리를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디어(매체)가 메시지가 되어감에 따라, 간단히 말해, 미디어는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 

<역자 서문> 中


나는 이 역자의 말에 동의한다. 우리 모두의 안에는 아이히만이 존재하고 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 옳은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저 옆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은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만의'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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