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자반 Oct 07. 2021

홀로 서는 공부

책 리뷰) '공부의 즐거움'을 읽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니체




 사실 그런 느낌은 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천재들',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위 우리가 말하는 '똑똑한 사람들'을 보면 태생부터 달랐을 것 같다는 느낌이. 부잣집에 태어나 충분한 지원을 받고 인생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은 느낌이.


 엄밀하게 따지자면, '똑똑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많은 교육의 기회를 받는다. 현재 대한민국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지정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의 70퍼센트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출처: e-나라지표) 더 나아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대다수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교육 이상의 사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런데 이 대다수의, 70프로의 사람이 '똑똑함'의 범주 안에 속하는가? 


 이토록 범람하는 교육의 기회 속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정규 교육의 기회를 거의 받지 못한 한 소년의 이야기.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하여 미국에서 2년 만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된 장회익 교수님의 이야기. 오늘은 그분의 저서 '공부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책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맨 위에 인용했던 철학자 니체의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장회익 교수님께서는 순탄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초등학교도 미처 다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를 그만 다니라는 할아버지의 명령이 있었고, 중학교도 중간 학년으로 들어와 마땅한 졸업장을 받지 못할 뻔하였다. 대학교 박사 과정 때에는 중간에 미국으로 학교를 옮긴 사정 때문에 충분한 학점을 듣지 못하여 학위가 미뤄질 뻔한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초등학교 중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어린 장회익 교수님이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짓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장회익 교수님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며, 제대로 가르쳐줄 선생님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고등학교, 대학을 지나 현재까지 이어져왔다. 그 시절 동안 무수한 어려움에 부딪혀 가면서 장회익 교수님이 획득한 능력은 '독자적인 학습 능력' 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 삶을 설계하고 배워나갈 수 있는 자세 말이다. 무엇이던 하나 망망한 목표를 정했으면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라도 그걸 추구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말이다.


 




 이 책을 덮고, '독자적인 학습 능력'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독자적인 학습 능력이' 중요한 이유를 단 한 가지만 꼽자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인 장회익 교수님의 케이스에서 보면, 철학에 관심을 가져 과학 철학이라는 새 분야를 만들었고, 한문을 혼자 터득해 '우주론'을 읽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터득한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독자적인 학습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도전일 것이다. '우주론'을 읽고 싶은데 한문을 어떻게 배우지? 한문을 가르치는 곳이 있나? 너무 어렵지 않을까? 여러 생각에 앞서 도전을 머뭇거릴 수 있고, 설사 도전을 하더라도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적인 학습 능력'이 있는가?


 책에서 아인슈타인과 저자를 비교했듯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저자와 나를 비교해 보았다.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교육의 기회들과 내가 홀로 공부했던 경험들을.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한 새로운 도전도, 홀로 하는 새로운 배움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경험들을. 어쩌면 나는 중요한 것들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삼, 인삼, 도라지


 이 글의 마지막은 저자 장회익 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마치고 싶다. 산삼 혹은 도라지가 될 것인가, 인삼이 될 것인가. 어쨌든 남의 손에서 자라면 인삼이라도 된다. 그러나 산삼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이 아닌 산이라는 야생에서 홀로 자라야 한다. 야생에서 자라는 것에는 갖가지 위험한 일들이 많다. 다 자라기 전에 죽을 수도 있고, 산삼이 아닌 도라지로 자라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짜릿하지 않은가? 나에게도 산삼이 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산삼, 아니면 도라지라는 과녁에 활시위를 당겨볼 수 있다는 것이.


 적어도 그것이 끝이 정해진 인삼의 삶보단 흥미롭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대입, 그리고 능력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