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변절, 그 가슴 아픈 에스노그라피
*들어가기 앞서, 앞으로 쓰는 많은 글에서 여성/남성 모두 '그'로 부르겠습니다.
2018년 2월 17일, 성은의 일기
"A의 소식은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연뮤덕이 되다니. 내가 모르는 것의 아름다움을 끝없이 말하는 그를 보며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구나 느꼈다. 난 5만 5천원을 낼 형편이 안 된다. 시골쥐가 된 느낌이었다. 들판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쥐가 서울 구경 한번 하더니 서울 자랑을 너무 많이 하는... 남겨진 시골쥐는 슬펐지만, 언제나 똑같은 것만 나눌 수 없으니 그의 취향 확장을 축하해 주려고 한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도 뮤지컬 보여주면 좋겠다."
영화가 인생이라고 했던 시네필 친구의 변절, 그 가슴 아픈 에스노그라피
3월 7일,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A
"원래 난 공연을 좋아했어"
성은
"거짓말..."
A
"생각해보면 살면서 지금까지 훌륭한 공연을 볼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 즐겨야 하는 지 몰랐던 것 뿐이야!"
성은
"그래서! 이제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A
"여러분 제가 두가지 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 무조건 가까이서 볼 것!
둘, 무조건 좋은 자리에서 볼 것!"
성은
"돈 없는 너가 어떻게 그런 깨달음을 얻은거지? 첫 영접의 순간부터 말해봐"
A
"사실 그 뮤지컬을 보게 된 건 스토리 때문이었어. 내가 관심있는 스토리였거든. 영화와 소설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나 궁금했어. 하지만 S석이었고 너무 뒷자리라서 잘 안 보였지. 별 감흥도 없었어.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넘버가 자꾸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음악을 들으려고 찾아봤는데, 글쎄 유튜브에 팬들이 가까이서 찍은 클로즈업들이 있더라고. 그 때부터 였던 것 같아."
그랬다. 그것은 사고였다. 덕통사고.
작년 10월,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난 태어나 한 번도 덕질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보라...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지 않은가?
성은
"야, 그 배우가 뭐가 그렇게 좋냐? 영화계에도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A
"노래까지 잘하는 사람은 없어!"
성은
"..."
A
"우연히 인터뷰를 보게 됐어. 그런데 그와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에 불을 붙인 것 같아. 그 사람과 내가 가는 길은 다르지만,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진지하게 해 나가면서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 걸 보니 와... 멋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성찰이 있는 사람
A가 꿈꾸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었다.
한번 더 보고 싶었던 그는 2회차 관람을 시도했다.
이번엔 좀 더 앞자리로 다가갔다.
A
"공연이 영화보다 좋은 이유... 앞에 앉아보니 알겠더라..."
성은
"뭐...뭔데..!"
A
"현.장.감...!
(1) 내 눈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2) 지금 어떤 상황과 감정에 휩쌓여서 (3) 그 자체로 어떤 인물이 되어 있다!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마음을 안 빼앗길 수 없는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 되나..."
마치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그의 눈빛은 촉촉해졌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뮤지컬의 과잉 요소, 일반적이지 않은 발성과 몸짓은 내겐 여전히 넘지 못한 벽이었기 때문이다.
A
"이해해. 하지만 너 그거 아니? 내가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 모든 과잉된 행동은 사라져... 그건 절대로 과잉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돼. 적어도 그 공연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그 인물이 되고, 그 인물의 입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바라보게 되지. 그렇게 하나되는 과정이 영화보다 훨씬 더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영화는 스크린을 거쳐서 만나지만 공연은 그 사람과 내가 바로 눈앞에서 만나는 과정이잖아."
성은
"그렇다면 나도 지금 눈 앞에서 만나는 과정이네~ 날 덕질할 요소는 없어?"
A
"인간은 순간 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잖아~ 돌려보기나 n차 관람이 어렵다구!"
성은
"ㅗ_ㅗ"
A
"뮤지컬은 영화보다 훨씬 더 감각적인 경험인 것 같아. 영화가 주는 추상적인 감정들이 뮤지컬에선 덜 해. 대신 그 순간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동, 시청각적인 자극들이 더 깊게 박히는 느낌이랄까. 그것들이 생생히 피부에 느껴지는 자리인 만큼, 좋은 영화를 볼 때 하게 되는 사색이나 깨달음 등은 덜한 것 같아"
영화를 보며 너무 많은 생각을 했던 그는 뮤지컬의 불꽃에 눈이 멀어 회전문 관객이 되었다. (5차 관람 인증)
그 날 부로 트위터에 가입을 했고,
공연을 못 보는 날엔 트위터로 대리 만족 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
커튼콜... 퇴근길... 하악...
성은
"트위터 아이디가 몰까^^?..."
A
"... 곧 계정 폭파할꺼야...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부끄러워...덕질... 부끄러워..."
나는 그의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 나의 덕질 경험을 공유했다.
하지만 나의 것과 그의 것은 달랐다.
나의 덕질은 주로 '내가 이런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당신도 와서 좀 보세요' 였다면
그의 덕질은...
A
"덕질은... 거리를... 둘 수 업떠...
대상과 나의 거리를 무한히 0으로 만드는 과정이지...
너가 하는 작업은, '내가 이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객관화 하는 작업'을 동반하는데, 덕질은 그렇지 않아... 내가 왜 좋아하는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좋아하는 거고, 나는 걔를 계속해서 햝기만 하면 돼..."
햝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너 혹시 진짜 햝아 봤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호기심이 생겼다. 집에 가서 해봐야지...
A
"하지만 요새는 안 그래...
열병이 식은 거지
이건 아마 내 흑역사로 기록될거야..."
누군가의 흑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에스노그라피가 될 수 있을까?
에스노그라피는 다른 문화의 일상생활에 들어가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설명하는 인류학의 현장 연구 방법이다. 2018년 2월의 끝으로 나의 문화인류학과 석사 학위는 소멸되었다. 흑흑 ... 한 학기만 다닌 죄 흑흑... 하지만 여전히 인류학을 사랑하고 배우고 싶다. 그래서 독학하기 위해 <독학매거진>에 합류했다.
지금은 <대신 일기 써드립니다> 정도의 기록에 머물지만, 조금씩 독학하면서 60살이 넘으면 인류학자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싶다. 기러기 위해선 기록해야 한다.
이번 인터뷰는 친구 A의 연뮤덕 정체성에 대한 인터뷰 반, 시네필 정체성에 대한 인터뷰 반 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내 마음을 더 흥분시킨 건 시네필에 대한 인터뷰인데 지금 대학내일 영상을 마저 편집해야 되서 우선 여기까지 쓴다.
그렇게 멀리 가 버릴것 만 같던 서울쥐는 다시 돌아왔다. 다시 그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영화를 만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그 전부터 n차 관람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었다. 처음 그의 시네필 정체성에 호기심을 가졌던 이유도 그가 <토니 에드만>을 극장에서 3번 봤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그 영화가 참 좋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실제 그 영화를 보니..
뭐라고... 이 영화를 3번이나 봤다고...? 미친 거 아냐?
나는 그가 꽤 정상인 줄 알았는데, 정상이 아닌 것을 알고, 마음 속 깊이 편안함을 느꼈다.
<토니 에드만>은 2017년 내게 가장 큰 쾌감(?)을 주었던 영화다.
'야, 연뮤덕 되니까 시네필 놀이 시시하냐' 라며 자꾸 딴지를 걸었던 시골쥐였지만 인터뷰를 하고 느낀 건, 그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갔다기 보다 새로운 감각신경을 발견했다는 것! 그리하여 영화 예술과 공연 예술의 즐거움을 느끼는 '서로 다른 방법'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사람의 인생은 어쩌면 그런 식으로 풍요로워 지는 게 아닐까? 쓰고 나니 왠지 축하해야 될것만 같잖아... 추...축하한다...너...?
인터뷰를 마무리 하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 물어보니 그는 있다 했다.
A
"최후의 변을 하겠습니다.
저는... 변절자가 아닙니다...
다만 호기심이 많을 뿐"
그래서 저는 넓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지요
혹시 당신에게도 사할 죄가 있으신지...
지금까지 읽어주어서 고맙습니다.
* 독학 매거진은 현재 매달 10일 (성은-문화인류학 독학) 20일 (주은-취향 독학) 30일 (세희-질문 독학)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독학하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인생은 셀프, 도전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