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큐브 정성일 GV 녹취록 전문
*이 글을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글은 2018년 8월 6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씨네큐브에서 <어느 가족> 상영이 끝난 후 정성일 평론가의 1시간 30분가량의 GV를 녹음한 녹취록입니다.
(개인적인 글) 저는 그때 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본 다음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에서 혼자 여행하면서 자막이 없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파악이 안 돼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유리는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을까... 정말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리고 두 번째 보았을 때, 저는 너무나 의아했습니다. 도대체 왜 오사무는 마지막에 쇼타에게 저렇게 말한 거지? 왜 변명을 하지 않은 거야... 저는 그 '도망'을 도망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도망'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정도인 인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그것이 너무 궁금해 정성일 GV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너무 소중한 경험을 했어서, 이렇게 녹취록을 공유합니다. (정성일 평론가 아카이브)에 문의드렸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내리겠습니다.)
저는 이 GV를 들으면서 영화를 세 번째로 보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말로 해주는 것과, 그걸 글로 받아 적은 걸 다시 보는 건 분명 감흥이 다를 겁니다. 저희 가족도 이 글을 읽어줬을 때보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제 입으로 전달해주니, 그게 더 조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 흥미롭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여기서 본 것들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영화로운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앞의 15분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시작하는 부분부터 공유하겠습니다.
(정성일 평론가) <어느 가족>을 본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영화, 참 감동적이라고. 하지만 당신의 감동은 행간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까? 누구나 영화를 보고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이 어디서 온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건 다른 일입니다.
만약 어떤 영화를 미학적으로 찍었다면 우리는 논리와 테크닉을 근거로 하나씩 따져 물어가며 해체해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감독이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이 장면에서, 이 씬에서, 이 쇼트에서, 이 대사에서, 이 퍼포먼스에서, 우리 ‘휴먼’이란 걸 보여주자’ 이러면 영화가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영화 너무 감동적이다’ 했을 때 ‘어... 나는 잘 못 느꼈는데’ 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미학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못 느낀 것에 대해서 ‘나는 영화 잘 모르니까’라는 알리바이가 생깁니다. 그런데 휴먼이라는 ‘공감’으로 밀어붙이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 A가 감동을 받았는데 B가 감동을 받지 못할 경우 영화가 맞받아칩니다. ‘넌 인간이 미숙하니까 감동을 못 받은 거야. 너에겐 아무리 설명해봐야 결국 이해 못 할 거야’ 이런 태도가 <어느 가족>에는 있습니다. 이때 영화가 무서워지죠.
말하자면 이때, 영화가 이런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비평이 위험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는 논증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오롯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삶에 대해서, 이해의 지평 안으로 얼마만큼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족>을 보면서 즉각 중얼거렸습니다. ‘이건 21세기 영화에서 사라져 버린 영화의 전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적어도 이걸 마지막으로 수행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 허우 샤오시엔의 <동년왕사> 나 <펑꾸이에서 온 소년> 같은 영화들. 허우 샤우시엔 조차도 어느 순간 영화를 ‘형식’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본 다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 허우 샤우시엔의 위에 언급한 영화들의 차원으로 영화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영화 <어느 가족>을 이야기하는 건,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등장인물의 어떤 태도, 어떤 결정, 어떤 순간을 음미해보고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서로 공감해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제가 마이크를 들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에서 용기를 냅니다. 저는 그 용기가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어 졌습니다. 오늘 저는 <어느 가족>의 절반만 설명할 겁니다. 여기서 절반이라는 건 영화의 중간 까지라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의미에서 절반만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에 설명하면서, 나머지 절반을 질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머지 절반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가족>은 무슨 이야기인가?
이 영화는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사실상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엄밀하게 이야기한다면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냥 한 집에 모여 있는 것뿐이죠. 하지만 그들은 가족처럼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때 영화는 각자에게 질문합니다.
오사무는 언제 쇼타에게 아빠가 되는가?
영화가 시작했을 땐 아빠가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끝났을 땐 아빠가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언제 되는가? 어떻게 되는가? 쇼타는 ‘언제’ 오사무를 아빠라고 인정하고 ‘왜’ 인정하는가?
이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 영화에 대해 감동받았다고 하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일 겁니다.
쇼타는 언제 유리에게 오빠가 되는가? 이건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까다로운 두 번째 질문이 기다립니다. ‘왜’ 오빠가 되는가?
노부요는 언제 유리에게 엄마가 되는가?
언제 쇼타에게 엄마가 되는가?
아키는 이 가족 안에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왜 자기의 직접적인 할머니가 아닌 자기 할아버지의 전처였었던, 그러니까 자기 할머니에게 남편을 빼앗겼었던 그 할머니, 자기완 아무런 상관없는 그 할머니를 찾아가서 의지하는가?
이 영화는 말하자면 가짜 가족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가 닿는 이야기, 그것이 되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 안에서 ‘언제’ 얻어 내는지, ‘어떻게’ 얻어 내는지를 보라고 찍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에 이미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영화를 볼 때에는, 시작하기 전의 이야기를 추리하는 과정으로 영화를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고레에다는 퍼즐 맞추기의 재미로 이 영화를 찍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첫 번째 볼 때와 추리의 과정이 다 끝나서 모든 관계의 재구성이 끝난 다음 두 번째로 볼 때 완전히 다른 영화입니다. 말하자면 감독은 ‘이 쪽으로 한 번 보게 만든 다음 자 이 쪽 아셨죠. 그럼 이제 다른 쪽에서 한번 봅시다. 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까지 말하고 싶어 집니다.
<어느 가족>은 1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겨울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납니다. 누군가 자기를 구원해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베란다에 있었던 유리. 그 아이를 처음에는 오사무와 쇼타가, 그다음에는 오사무와 노부요가 데리고 갔다가, 다시 그 가족에게 유리가 되돌아가기까지의 일 년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의 맨 마지막은 유리가 베란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느 가족>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 가짜 가족에게 유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유리가 이 가족 안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이들은 올해에도 지난해와 똑같이 살았을 것이고, 이듬해에도 똑같이 살았을 겁니다. 유리가 이 집안에 들어오자 균열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질문과 부딪히게 됩니다. 유리는 이 가족에게 균열을 일으켰고, 유리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유리가 일으킨 균열을 통해서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과 이 가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이들은 모여 삽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의식은 희박합니다. 서로에게 어떤 결속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첫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사무와 쇼타는 슈퍼마켓에 가서 도둑질을 합니다. 이때 둘의 모습은 부자관계라기보다는 파트너십에 가깝습니다. 둘은 돌아오면서 이야기합니다. ‘왠지 눈이 올 것 같군’ 그러나 그 해 겨울, 눈은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이듬해에 내리고, 그 이듬해에 오사무와 쇼타는 같이 눈사람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그때에는 완전히 다른 자리에서 완전히 다른 이유로 완전히 다른 집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에겐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돌아오는 길에 유리를 마주칩니다. 유리에게 엄마가 없냐 물어보자 없다고 대꾸합니다. 엄마는 없는 편이 낫다는 그 거절의 제스처, 부정의 퍼포먼스. 오사무와 쇼타는 유리를 데려왔다기보다는 주워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이 표현을 노부요가 나중에 사용하지요.
유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이때 이 집의 미장센이 주는 첫 번째 느낌은 뭡니까. 지나치게 과밀하다는 겁니다. 지나치게 꽉 차 있습니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감독은 이 집안을 꽉 채움으로써, 이 집을 잘 찍는 걸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건 선언하는 겁니다. 잘 찍는 건 불가능한 공간이라고. 이 선언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 영화 사상 집안을 가장 잘 찍는 감독, 오즈 야스지로. 그를 닮은 고레에다. ‘나는 오즈 같은 영화를 찍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이 날 보고 항상 오즈 영화 같다고 얘기하지만, 오즈가 불가능한 공간으로 들어가서 이제부터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앉을자리가 없을 것 같은 좁은 공간에서 쩔쩔매면서, 카메라를 비집고 밀어 넣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가족의 한 명처럼 그 일부를 차지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의 미학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애쓴다’라고, 동사형으로 대답하고 싶어 집니다. 이 애쓰는 모습이 사실상, 가족 각자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는 심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가족>은 심정을 물리적으로 찍으려 애쓴 영화입니다.
저녁밥상에서 오사무는 할머니를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합니다. 이 무례한 행동.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가지를 봅니다. 1. 할머니에게 어떤 공경심도 없다. 2. 오사무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하나의 장면에서 하나의 퍼포먼스에서 계속해서 미학적 추론이 아닌 그 인간에 대해 계속 추론하도록 찍어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인간일까. 이 제스처 하나로 그 인간을 추론해 내게끔 그러한 방식으로 일부를 보여주며 전체를 끊임없이 추론하는 방식으로 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가족>은 영화에 찍히지 않은 것을 보는 게 중요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한참 이야기가 진행된 다음 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츠에 할머니는 식사 중인데도 발톱을 깎고 있습니다. 이 할머니도 오사무 못지않게 품위도 없고 배려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스처를 취합니다. 오사무를 괴롭히려는 게 아닙니다. 평생 이렇게 살아온 사람인 겁니다. 할머니는 유리를 보면서 이야기합니다. 왜 이렇게 말랐니. 우리는 이 질문이 무엇인지 금방 압니다. 그건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뜻이죠. 그다음 이야기합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네. 어린애가 상처투성이인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 맞으면서 컸다는 것.
이건 대사를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요점은 뭡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순간 예민하게도 그 질문에 말 못 하는 유리를 카메라로 잡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을 함께 프레임에 넣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노부요입니다. 이제까지 유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노부요가 ‘온몸이 상처투성이네’ 하는 말에 고개를 돌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타이밍을 딱 맞춰서. 그 말에 갑자기 반응하는 건 뭡니까. 어린 시절 매 맞고 자란에게 금방 반응하는 건 자기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에게서 즉각적으로 자기를 본 겁니다. ‘나랑 똑같은 애가 온 거야? 내가 과거에 겪었던 걸 지금 똑같이 겪는 애가 우리 집에 나타난 거야?’라는 듯한 즉각적인 반응. 이 장면에서 고개 돌리는 노부요를 보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안 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까닭은, 만약 이 장면이 없었더라면 노부요가 오사무와 함께 유리를 원래 집으로 데려다주러 갔다가 안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미친 거죠. 갑자기 그 애를 데려오는 건. 이 쇼트가 있어야만 ‘아.. 이 아이를 저 집으로 보내면 분명 또 맞을 거야. 또 맞는다는 건 내가 너무 잘 알지. 오늘도 맞을 거고, 내일도 맞을 거고, 다음 달도 맞을 거고, 내년에도 맞을 거고, 소녀가 되어서도 내내 맞을 거고, 그런 다음 어른이 되어 이 집을 탈출하기 전까진 계속 맞을 거야. 차라리 그때까지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나아’ 자기 삶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얘기를 강조하는 까닭은 고레에다가 영화의 전 쇼트를 그렇게 진행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쇼트를. <어느 가족>은 굉장한 영화입니다. 당신은 이 장면에서 어디까지 봤습니까. 당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디까지 입니까. 나는 그 깊이까지 간 사람과 이 영화를 같이, 영화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 영화 속에 그려진 이 사람들을 같이 공감해보고 싶습니다.라는 호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족>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건 호소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가 신파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고레에다의 호소에 근거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를 테면 이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유리를 데려다주러 가면서 노부요가 얘기합니다. ‘참 애가 넉살도 좋네. 잠이 들었군. 크로켓을 3개나 먹었으면서 말이야’ 우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돌아가는 길에 크로켓 다섯 개를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을 왜 넣었지? 약간 의아했죠. 고레에다는 어떤 쇼트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요점은 크로켓이 아닙니다. 다섯 개입니다. 이들은 저녁 밥상을 차려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집안입니다. 크로켓은 별미였을 겁니다. 오사무는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쇼타는 아직 아이입니다. 다섯 개의 크로켓을 샀는데 유리가 3개를 먹었습니다. 유리가 3개를 먹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3개를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은 전혀 없지만, 좀도둑질이나 하며 빈곤하게 살고 무례하게 젓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며 식탁에서 발톱을 깎는 인간들이지만, 착한 사람들이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무한정 착한 게 아니라, 크로켓 3개를 양보할 정도의 착함. 일상생활에서의 착함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무언가를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 이들은, 이 낯선 어린아이를 환대할 만큼. 크로켓 3개를 양보할 만큼만 착한 사람들입니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유리의 집에 도착해서 부부싸움을 엿들으며 그 아버지가 유리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부요는 돌려줄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노부요는 주저앉습니다. 그 제스처가 뭔지 오사무는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언지 안다는 것, ‘돌려줄 수 없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걸 안다는 것. 어떤 삶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 자기가 살아봐야만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노부요는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던 건 자기가 살아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하츠에는 아키와 은행에 갑니다. 여기서 할머니는 돈을 찾으며 입으로 비밀번호를 중얼거립니다. 우리가 이 장면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건 한 참 뒤입니다. 할머니가 죽고 나서. 그 중얼거림의 의미는 자기가 죽은 다음에 모두 다 찾아가란 뜻입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아키에게는 사아카라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그게 자기 동생 이름이란 걸 아는 건 한참 뒤의 일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츠에 할머니는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일상생활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상이 이들 각자 내면의 빙산의 일부라는 걸 보게 됩니다. 몇몇 장면을 같이 떠올려 봅시다. 혼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민간 복지사가 찾아오자 그 자리에서 쇼타와 유리는 집을 비우기 위해 빠져나옵니다. 그다음 쇼타와 유리가 걸어가는 길을 통해서 우리는 쇼타에서 어떤 친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일합니다. 동료들과 대화하는 걸 들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 문득 떠올립니다. 그건 노부요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에게 왜 아이가 없을까? 아이를 안 낳은 걸까. 오사무 같은 남자가 있는데 왜 아이가 없는 걸까? 영화 앞부분은 우리들에게 계속 질문을 품게 합니다.
오사무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공사를 하다가 어느 아파트의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다다이마, 쇼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다녀왔습니다. 쇼타.’ 이 쇼타가 어린 쇼타가 아니라 사실상 오사무의 본명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한참 뒤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너무 이상하기 때문에 아마도 잊기는 힘들 겁니다. 오사무는 집이 갖고 싶습니다. 하우스가 아닌 홈을 가지고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죠. 하지만 이 어느 가족이 있는 데도 오사무가 공사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오사무는 그렇게 자기를 맞이할 곳이 늘 그립다는 뜻입니다. 오사무는 이 가짜 가족이 사는 곳을 홈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갔을 때 한 번도 다다이마라는 인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이들과 어울려 살기는 하지만 그냥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 이인 겁니다. 그리고 자신은 패밀리, 가족, 홈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이 공간에 들어서서 이야기합니다. 오사무 마음속에는 모여 살고 있는 이들과 언젠가는 헤어져야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 집을 갖기 위해서 자기 홈을 갖기 위해서 자기 패밀리를 갖기 위해서... 왜? 이들은 나의 패밀리가 아니니까. 이 장소는 나의 홈이 아니니까. 이런 번듯한 아파트에서 다다이마라고 돌아와서 매일 저녁 인사할 수 있는 사람들, 집이 필요하다는 걸 무심코 내뱉을 때, 이런 장면을 놓치지 않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정말 본 겁니다.
영화를 본 다는 건 그 장면을 ‘정말 보는’ 겁니다. 얼핏 보면 영화의 전반부는 가난하지만 즐거운 유토피아처럼 보이죠. 어떤 집이든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됩니다. 고레에다가 일본에서 했던 인터뷰를 찾아보았습니다. 자기가 이 영화의 일본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가장 실망한 것 중 하나는 이 가족들의 모습을 마치 유토피아처럼 해석할 때라고 했습니다. 그때 분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게 유토피아 일 수 있는가. 이걸 유토피아로 느낄 정도로 일본 사회는 망가졌는가. 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사무가 다리가 다쳐 넘어졌을 때, 그 가짜 가족 중에서 얼마나 다쳤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 돈 얘기만 합니다. 이들이 왜 여기에 모여 사는지 보여주는 건 돈입니다. 하지만 감독은 우리들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만큼 가난을 의식적으로 비참하게 찍지 않았습니다. 그의 전작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아무도 모른다는 찍으면서도 가난을 비참하게 찍지 않았습니다. 통상적으로 가난을 찍는 감독들은 가난 자체를 비참하게 미장센으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이미 가난한 삶에 들어섰을 때 그건 일상이 된다고, 생활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은 그가 긴 시간 동안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다큐를 제작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경험에 결과일 겁니다.
영화는 시작하고 30분 정도 리듬감을 잡아 놓은 다음, 이 관계에서 균열이 생겨나는 걸 보여줍니다. 그 첫 순간은 쇼타에게서 시작됩니다. 낚싯대를 훔칠 때, 쇼타는 오사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쟤는 안 시켜도 되잖아’ 쇼타는 그런 저항의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오사무의 나이가 되면 변화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습니다. 노부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쇼타는 계속 변하는 나이입니다. 한 달이 다르게 변화해 갈 겁니다. 고레에다는 쇼타가 변해가는 그 변화의 변곡점을 놓치지 않고 찍어가고 있습니다.
‘쟤는 안 시켜도 되잖아’라고 말할 때 쇼타는 이제 더 이상 오사무가 시키는 대로 가서 물건을 훔치는 철없는 아이가 아닙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어떤 선이 생겨난 겁니다. 오사무 역시 갑자기 깨닫는다면 그것도 이상하죠. 영화가 한참 더 지난 다음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여동생에겐 시키지 마라’ 그 외부의 메시지가 내면의 변화와 하나로 만나서 ‘넌 들어오지 마’라는 행동이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이 구멍가게 할아버지의 한 마디만으로 ‘너 들어오지 마’ 했다면 그건 진짜 황당한 연출이죠. 내면의 변화 없이 외부로부터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죠. 고레에다는 여기에서부터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이 쇼타라는 아이가 변할 것이라는 걸, 여기서 준비시키는 겁니다.
유리도 쇼타의 감정을,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느낍니다. 그걸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는데 유리는 쇼타를 기다립니다. 쇼타가 돌아오지 않자 그가 돌아오길 깊은 밤 마루에서 기다립니다. 다섯 살 밖에 안 된 애가 그 감정이 뭔지 알 리가 없습니다. 알면 더 이상한 일이죠. 하지만 유리도 쇼타의 감정을 느낀 겁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서로 간의 이해를, 미세하게 움직이는 변화를, 미세해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정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쫓아갑니다. 저는 이런 영화가 섬세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인물이 작게 움직이는 게 섬세한 게 아닙니다. 작게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상 인간의 내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큰 사건들... 여러분들에겐 내면의 사건이 항상 겉으로 드러나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자기는 그렇지 않으면서 영화 속 인물은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노부요는 쇼타를 기다리는 유리를 보며 이야기합니다. ‘부모한테 그런 짓을 당했는데도, 저러기 쉽지 않은데...’ 오사무는 대답합니다 ‘보통은 그렇지’ 그들은 유리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성장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노부요는 유리에게 특별하게 친절합니다. 그러나 이 친절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친절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딸을 돌보며 베푸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둘의 감정을 오해한 겁니다. 노부요가 친절한 건 유리에게서 자기의 어린 시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받지 못한 걸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른인 자기가 어린 자기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베푸는 친절입니다. 그 동질성을 느껴보는 결정적인 장면은 욕조신입니다. 다리미로 지진 상처를 보여주며 팔을 대보는 장면에서 감독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부요는 유리의 옷을 불태우면서 말합니다. ‘맞고 지낸 건 네가 나빠서가 아니었어.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건 거짓말이야. 사랑한다는 건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꼭’ 그렇게 노부요는 유리를 안아줍니다. 어린 시절의 자기를 안아줍니다. 노부요는 아직 엄마가 되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그냥 잘해주는 것, 사랑해주는 것, 안아주는 것만으로는 무엇이 모자란 건지. 그 순간을 알기까지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름이 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유리가 스스럼없이 쇼타를 오빠라고 부르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쇼타의 손동작을 흉내 내죠. 전수해 준 겁니다. 하지만 이때 구멍가게 주인이 불러 아이스바를 건네며 쇼타에게 말합니다. 여동생에겐 시키지 말라고. 연출상으로는 간단하지만 이 말이 쇼타에게 무얼 가르쳐주었는지 설명하기는 매우 까다롭습니다. 고레에다는 설명하기 까다로운 그것을 찍으려 합니다. 그는 여기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영화라는 형식을 무시하는 과정’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영화는 굉장해집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감동, 이 정도의 밀도, 이 정도의 용기를 가지고 밀어붙였던 적이 있었나.
비 내리는 날 두 사람은 섹스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를 문득 멈춰 세웁니다. 어...? 이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됩니다. 노부요가 맞은편에 앉아 있습니다. 슬립을 입고 화장품도 바꿨지 하며 소면을 먹을 때, 오사무는 노부요와 섹스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못 합니다. 계속해서 어... 이 거들 끈 좀 봐... 하며 건드려 볼 뿐입니다. 부부라면 나 지금 사랑을 나누고 싶어 얘기했겠죠. 정확한 메시지를 보내겠죠.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건드려보기만 하자 노부요가 그걸 알아봅니다. 하지만 뜻을 묻지 않고 그냥 섹스합니다. 두 사람은 이걸 서로 물어보는 순간 어색해진다는 걸 압니다. 그들에게 이게 왜 힘든 일인지를 아는 건 한참 뒤의 일입니다.
이 장면은 섹스가 포인트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여기까지 쫓아왔을 때 다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들에게 ‘당신은 이 가족들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영화는 반문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경찰서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오사무가 노부요를 구했지만 그건 불륜의 관계였고 오사무는 노부요의 남편을 살해하고 암매장했습니다. 정당방위라고는 말하자면, 비 오는 날 섹스하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살인이라는 심연이 놓여 있었던 셈입니다. 아키가 두 사람 무슨 사이냐 했을 때 오사무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거 필요 없어 우리는 마음으로 연결된 사이야’ 그런 다음 해변에 가며 이야기의 절반이 끝납니다.
그런 다음 이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영화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다른 방식으로 저 개 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해변으로 여행 갈 때, 의도적 이리만큼 영화가 중간을 딱 자르는 듯 찍어져 있죠. 마치 꿈결 같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15분이 지난 순간, 하츠 할머니는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다들 고마웠어’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유리가 이가 빠졌다고 합니다. 마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걸 발견합니다. 그리고 오사무와 노부요는 할머니의 시신을 유기합니다. 여기까지 영화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진짜는 이다음부터입니다.
‘자 이제 관점을 바꿀 거야’
영화가 갑자기 관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보통 이제까지 고레에다의 영화는 하나의 관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관점을 옮겨갑니다. 균열은 다시 한번 쇼타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여느 때처럼 오사무는 자동차를 털기 위해 쇼타와 함께 주차장을 배회합니다. 그리고 쇼타에게 망치로 유리를 깨보겠냐고 제안합니다. 쇼타는 제안을 거절합니다. 쇼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오사무의 제안을 거절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게 내면의 변화인지, 깨라고 요구한 것이 자동차이기 때문인지는 애매합니다. 쇼타가 자동차 유리를 깬 다음 거기서 데려온 아이라는 걸 우리는 여기서 처음 알게 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우리에게 모든 걸 명확하게 알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구멍가게에 갔더니 상중이라고 붙어 있습니다. 쇼타는 오사무와 달리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아이입니다. 영화 내내 쇼타가 책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상중이라는 말을 아마 쇼타는 이해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을 겁니다. 슈퍼에 들어가면서 쇼타는 유리를 바깥에 있으라 하고 혼자 훔치러 들어갑니다. 유리가 따라 들어가서 초콜릿 봉투를 훔치려 하자 그걸 막기 위해 가게를 엉망으로 만들고 도망칩니다. 우리 이 행위를 하나씩 따져 봅시다.
이때 이 행위가 희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건 희생입니다. 어떤 희생? 오빠로서의 희생. 그런데 쇼타는 유리의 오빠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가정했을 뿐입니다. 이때 정확하게 쇼타는, 이 행위를 통해서, 오빠의 자리로 갑니다.
이 장면은 아마 누구라도 금방 이해될 겁니다. 그다음 쫓기던 쇼타는 양쪽으로 몰리자 고가도로에서 뛰어내립니다. 우리는 거기서 높이를 봤습니다. 이 행위는 어떤 제스처입니까. 자살의 제스처입니다. 이건 그냥 뛰어내린 게 아니라 죽어버리겠다고 한 겁니다. 이때 쇼타가 두 번 희생의 행위를 했다는 걸 놓치면 안 됩니다. 첫 번째는 오빠로서 유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가 잡힐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사실 앞에서 쇼타는 떠올렸습니다. 내가 잡히면 우리 가족 전체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이 가족이 문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쇼타에게 단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나를 삭제시키는 것. 그래서 고가도로에서 쇼타는 말하자면 자기를 삭제시켜서라도 이 가족을 지키려고 뛰어내립니다.
이 행위. 말하자면 하나의 결심. 희생이라는 결심. 이 희생이 자살을 각오했다는 걸 계산해야만 뒷부분이 이해되기 시작할 겁니다. 가족들은 모두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문당합니다. 핵심은 심문 과정을 통해 그들의 과거를 아는 게 아닙니다. 고레에다는 <세 번째 살인>을 찍을 때에도 추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사회로부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사회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이때 심문하는 경찰과 변호사들이 이상하리만큼 친절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이들은 사건을 파헤치듯이 하지 않습니다. 이 이상할 정도의 친절함. 말하자면 사회로부터의 질문에 대해서 이들이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영화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들이대고 그들의 대답을 보고자 합니다. 영화에서 노부요를 연기한 안도 벚꽃은 굉장한 연기를 보여주죠. 아마도 올해 지구 상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을 겁니다. 영화를 본 누구라도 이 장면을 보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아도 마음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차례차례 천천히 쫓아가겠습니다. 오사무에게 질문합니다. ‘애들한테 도둑질을 시키다니 양심의 가책은 없었습니까? 당신은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습니까?’ 오사무가 대답합니다. 나는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이 말의 행간은 뭡니까. 오사무는 이 질문 앞에서 자기에게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걸 고통스럽게 인정한 겁니다. 아빠라는 말이 늘 듣고 싶었던 그에게 ‘당신은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습니까?’라고 사회가 그를 때린 겁니다. 오사무는 대답합니다. ‘가르칠 게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밖에 없는 자는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죠. 그걸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장면. 나는 아빠가 될 자격이 없었다는 걸 고통스럽게 인정합니다. 그러자 질문합니다. ‘왜 소년 이름을 쇼타라고 했나요. 당신 본명이잖아’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같은 종류의 인간입니다. 노부요가 유리에게 했던 걸 실은 오사무도 쇼타에게 했던 겁니다. 오사무는 쇼타의 자리에 가서 자기가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자기가 해 주는 것에 만족하며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살았던 자기가, 말하자면 쇼타에게 자기의 본명을 안겨준 다음, 어린 쇼타 듣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해주면서, 만족하며 살았던 겁니다. 그게 부끄러운 줄 몰랐던 겁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한 번도 그게 부끄러웠다고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들은 순간, 그제야 내가, 아 비로소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걸 오사무는 깨달은 겁니다. 이 영화는 인물의 마음을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는지 한 번 밀고 들어가 보자고 합니다.
노부요와 오사무. 그들이 아이들에게 잘해준 건 사실입니다만, 부모로서 그 행위를 한 게 아닙니다. 아직 그들은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싶어 집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마주 보는 건 뭡니까. 두 사람이 나쁜 인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미숙한’ 인간들이었던 겁니다.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나쁜’ 인간들이 있었죠. 노부요의 부모, 오사무의 부모, 유리의 부모, 나쁜 인간들. 악질적인 인간들. 그러나 착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부모가 되는 건 아닙니다. 미숙한 인간들은 아직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겁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양쪽으로 물어봅니다. 이 쪽도 자격이 없지만, 이 쪽도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이건 되게 무서운 순간이죠. ‘단순히 도식적으로 착한 부모 / 나쁜 부모 나누는 거. 그거로는 충분하지 않아’라고 영화로 맞받아칩니다.
안도 사쿠라가 눈물을 닦는 바로 그 장면. ‘집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아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하죠’ ‘엄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게겠죠’ ‘낳으면 다 엄마가 되는 겁니까?’ 아직도 그는 엄마로서 질문한 게 아니라 딸로서 이 질문을 한 겁니다. 이때 노부요가 생각하지 못했던 답문을 받습니다. 이 말을 했을 때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 그 순간 노부요는 깨닫습니다. 두 아이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 질문은 노부요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그렇게 노부요는 자신이 쇼타에게도 유리에게도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장면은 보는 사람을 멈추게 만들죠.
자 그다음, 더 굉장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가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아니야. 아직 끝난 게 아니야’라고 더 밀어붙여봅니다.
교도소에 오사무와 쇼타가 찾아왔습니다.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겨울입니다. 노부요는 명랑한 얼굴로 쇼타에게 말합니다. 쇼타를 주어온 장소, 번호판을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원하면 친부모 찾을 수 있어’ 명랑하게 얘기합니다. 눈시울은 젖었지만 명랑하게 얘기합니다. 그러자 오사무가 당황하면서 ‘그런 말을 하려고 쇼타를 데려오라 한 거야?’라고 묻자 노부요는 망설이지 않고 얘기합니다. ‘응 이 아이한테 그걸 말하려고 데려오라고 했어’ 그러더니 오사무한테 얘기합니다. ‘우린 역부족이야... 이 아이를 맡기엔’
그리고는 면회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일어납니다. 이 행동. ‘네 친부모 찾을 수 있어. 네 친부모랑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네가 찾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그 노부요. 그 노부요의 그 행위만이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노부요의 엄마로서의 행위입니다. ‘넌 그게 더 나을 거야. 나 같은 여자, 나는 너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야. 우리 같은 가족들과 살면 너 인생 망칠 거야. 너 인생 망치면 안 돼. 다시 시작해야 해. 친부모 찾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는 마음. 진짜 엄마 마음이죠. 그건 진짜 엄마 마음이죠.
변호사로부터 질문을 받고 교도소에서 긴 시간 생각했을 겁니다. 진짜 엄마로서의 행위는 무엇인가. 그래서 영화에서 뭐가 필요했습니까?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간. 그러고 나서 데려오라고 했죠. 데리고 오라고 한 다음 쇼타에게 얘기한 겁니다. 진정한 엄마로서의 행위. 말하자면 이때, 이때 노부요는 비로소 엄마가 된 겁니다.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립니다. 눈사람을 만들자고 쇼타가 제안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두 개의 눈사람이 아닌 하나의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가족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냥 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쇼타인지 오사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부자리에 누워서 대화합니다. ‘내일 돌아가야 되지?’ ‘응’ 그러더니 쇼타가 질문합니다. ‘있잖아. 날 두고 도망가려고 했어?’ 이 말의 행간을 본다면 쇼타가 얼마나 어른이 되었는지, 멈칫하게 됩니다. 잘 따져봅시다.
쇼타는 그들이 왜 떠나려고 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잡히면 가족 모두가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소년입니다. 그랬던 소년이기 때문에, 자기를 놔두고 왜 이들이 떠나려고 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겁니다. 행여 우리가 놓칠까 고레에다는 심지어 병원에 누워서 자신의 부러진 발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쇼타의 쇼트를 포함시켰습니다. 고레에다는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지금 이 장면 왜 보여주고 있는지 생각해 봐달라 합니다. 그는 굉장히 친절하게 찍었습니다. 물론 그걸 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겐 안 보입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찍었습니다.
쇼타는 지금 진실이 궁금한 게 아닙니다. 진실은 이미 아니까.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쇼타는 왜 이 질문을 한 겁니까. 오사무의 대답이 궁금했던 겁니다. 그 대답이 듣고 싶었던 겁니다. 쇼타는 어제의 그 어린애가 아닙니다. 자, 그런데. 오사무가 대답합니다. ‘응, 그랬어’ 아무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문해야 합니다. 왜 변명하지 않습니까. 왜. 왜 오사무는. 하고 싶은 변명이 만 마디쯤 있을 텐데,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만 마디쯤 할 수 있었을 텐데, 변명하지 않습니다. 변명하지 않는 까닭은 그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이때 이 말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인지, 오사무는 이 말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어떻게 얘기합니까. 등 돌리고 이야기합니다. 얼굴 마주 보고 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겁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얼굴을 마주 보고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등 돌리고 얘기한 겁니다.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 이때 오사무는 이 대답을 할 때, 노부요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을 겁니다. 영화 전체에서 오직 이 장면만이, 오사무가 아버지로서 한 대답입니다.
둘의 관계를 끝내는 것. 그것만이 쇼타가 나 같은 인간이 되지 않는 길이라고 오사무는 생각했을 겁니다. 나처럼 도둑질이나 하고, 낯선 할머니 집에 머물면서 연금 뜯어먹고, 애들한테 도둑질이나 가르치는 그딴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는 것.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아저씨로 관계를 멀리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아버지로서 대답한 겁니다. 오직 이 말만을, 아버지로서 대답한 겁니다.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기 직전에 쇼타가 말합니다. 뜬금없이 말합니다. ‘일부러 붙잡혔어’ 인사도 하지 않고 탁 등을 돌려 타버립니다. 오사무는 그 말에 약간 어리둥절하며 대답합니다. ‘아... 그랬구나...’ 일본 특유의 ‘소 데스네’ 오사무는 그게 무슨 말인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쇼타가 그 말을 했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 겁니다. 근데 버스가 떠나는 순간, 그제야, 이해가 된 겁니다.
쇼타가 병원에 있단 통보를 오사무는 들은 사람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건 다리가 부러져서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건 고가도로에서 뛰어내렸기 때문입니다. 고가도로에서 뛰어내린 까닭은 쫓겼기 때문입니다. 쫓겼을 때 뛰어내린 건 거의 자살할 결심이었다는 걸 오사무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만약 쇼타가 일부러 붙잡힐 생각이었다면, 고가도로에서 뭐하러 뛰어내립니까. 일부러 붙잡히면 되지. 세상에 고가도로에서 뛰어내려 일부러 붙잡히는 사람도 있습니까.
쇼타는 지금 오사무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맞받아치고 있는 겁니다. 그 말은 나 지금 당신이 나를 두고 가려고 했다는 그 말 거짓말이라는 거 알아요 라고 맞받아 친 겁니다. 그걸 깨닫고 쇼타가 탄 버스를 오사무가 뒤쫓아 오죠. 아버지로서 한 그 대답을 알아준 쇼타에게 감사해서. 그 애타는 마음으로 쫓아옵니다. 왜? 자기를 처음으로 아버지로 대접해 준 거니까. 하지만 그 말, 쇼타의 말을 저는 이렇게까지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나는 당신의 거짓말을 이해합니다. 그러니 용서합니다.’
하지만 쇼타는 오사무가 쫓아오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이렇게 말해야 될 겁니다. 오사무가 그 말을 깨닫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왜? 오사무는 이제까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아마 쇼타는 더 이상 오사무를 만나지 않을 겁니다. 오사무를 더 이상 보게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뒤돌아보면서 이야기합니다. ‘아빠’
자, 이제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왜 이제야 쇼타가 오사무를 아빠로 부르는가’
쇼타는 이 가짜 가족을 위해서 자살할 결심을 했던 아이입니다. 쇼타는 이 과정에서 뭘 배웠습니까. 희생이란 걸 배웠습니다. 가족이란 건 희생한다는 것. 오사무가 어젯밤에 한 것은, 어젯밤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희생입니다. 노부요가 했던 그 행위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그건, 오사무가 얼마나 쇼타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는지, 말하자면 쇼타는 그 간절한 마음을 본 겁니다. 쇼타는 그래서 오사무를 아버지로 인정해서 아빠라고 부른 게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드리겠습니다.라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아빠’라고 불러준 겁니다. 말하자면 쇼타는 그렇게 어른이 된 겁니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엔 쇼타가 어른이 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쇼타는 친부모에게 돌아가기를 거절한 아이입니다. 그건 무슨 얘깁니까. 자기가 이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쇼타는 친부모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마지막 장면. 물론 마지막 장면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누구나 이해할 수밖에 없죠. 유리가 숫자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는 언제 배웠습니까. 욕조에서 노부요와 함께 그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 노래를 유리가 부를 때 그건, 유리가 바깥을 내다보면서, 노부요에게 데리러 와달라는 그 노래인 겁니다. 하지만 노부요는 오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쇼타에게 한 그 말을 생각한다면. 그게 유리를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장면은 절망적인 장면입니다. 유리는 자기 노래의 대답을 찾지 못할 겁니다. 이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자, 여기까지의 설명이 이 영화의 절반입니다. 이제 돌아가는 길에 여러분들은 나머지 절반을 대답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대답해야 할 것들.
‘아키는 왜 집을 나왔습니까’
‘아키는 왜 여동생 사아카의 이름을 쓰면서 성인 유리방에 나가고 있습니까’
‘돈을 내지 않으면서 할머니와 했다는 약속은 도대체 뭡니까’
영화에 답이 다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아키에게 하츠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전처입니다. 그런데 왜 하츠에 할머니는 아키를 받아들인 겁니까? 한편 노부요는 어땠을까. 하츠에 할머니는 어느 오후, 걸어가며 노부요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하츠에 할머니와 노부요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 설명 없이 <어떤 가족>은 완결되지 않습니다. 완결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까지 제가 설명했었던 노부요와 오사무, 쇼타, 유리의 이 설명을 위협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제 이야기를 스스로 때려 부실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어느 가족>에서 이 나머지 절반을 맞추어야만 이 어느 가족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걸 짜 맞추는 과정은 추리소설 퍼즐로는 절대 맞춰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감옥에서의 장면, 눈 내리는 장면을 설명했던 것처럼 다가가야만,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방식으로 다가가야만 설명될 겁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렇게 찍었습니다. 분명한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여기서 영화를 다른 차원으로 잡아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미학적 경험을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겁니다. <어느 가족>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면서 대답을 찾는 그 과정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더 깊게 만드는 과정이 될 거라는 점에서, 저는 이런 영화가 고마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폭염을 뚫고 집에 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개인적인 글) GV를 들으며 이렇게 눈 앞에 영화가 한장면 한장면 펼쳐지긴, 영화를 볼 때보다 더 많이 울어보긴 처음이었다. 건너편에 앉았던 젊은 남자도, 앞쪽에 앉았던 아주머니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내 뒤엔 재수학원 다닐 때 출석체크를 하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 분 영상 자료원에서도 두 번이나 마주쳤는데 정말 영화를 좋아하시나보다 오늘은 꼭 인사해야지! 하지만 끝나고 뒤돌아보니 이미 가셨다. 내가 너무 훌쩍거려 민망하실까봐 그랬나. 하지만 왠지 그 분과는 영화관에서 한번 더 마주칠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성일이라는 사람을 나무위키로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이 글을 읽었다. '당신 없이 누구랑 영화 이야길 하지?' 나의 소중한 영화 친구들이 생각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