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GV에서 할 말이 생각났을 때

21.11.27

by 치슬로

큰 결심을 해야 갈 수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국제영화제와는 달리, 서울독립영화제는 지역 특성상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가게 된다. 달력이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갈 때 영화나 보러 갈까- 싶어지면 어느새 거기 있기 때문.


오늘은 또치 초대로 유태오의 <로그 인 벨지움> 과 김덕중의 <컨버세이션> 을 봤다. 실험적인 연출보단 서사를 갖춘 형태를 좀 더 좋아해서 딱 내 취향인 영화들은 아니었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가져올 수 있었다.


<로그 인 벨지움> 은 정말 돈내고 보는 잘생긴 유태오 브이로그... 여서, 저렇게 자기 브이로그를 영화제에 내서 메이저 독립 배급사가 배급까지 할거면 우리도 영상 찍어서 못할게 뭐가 있냐고 해서 홧김에(?!) 셋이서 로그 인 벨지움 감상평 및 성토 영상을 찍었다. 다 찍고 보니 러닝 타임이 무려 10분.. :)


<컨버세이션>은 제목만큼이나 대사가 롱테이크와 함께 거의 장대비만큼 쏟아지는 영화였다. 초반 대사들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고 게다가 무지막지한 롱테이크여서 (거의 임권택 <서편제>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게 여러번...) 초반에 좀 졸다 보니 막판엔 또 대사가 너무 웃기고 재밌는데 안그래도 서사가 뒤죽박죽인 영화라 뭘 어떻게 이해할 새도 없이 GV를 맞이하였다.


두 영화 모두 공통점을 찾자면 '언어' , 그중에서도 '외국어' 에 대한 영화였다는 것. 유태오는 듣기로는 독일 태생으로 아는데, 그래서인가 <로그 인 벨지움>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스스로와의 대화는 독일어로 시작하여 영어, 한국어로 이어진다.


<컨버세이션> 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세 여자의 수다로 초반 장면들이 채워지는데, 그들은 불어로 말하기 어색하다고 하면서도 (영화에선 거의 암시처럼 등장하지만) 과거의 섹스와 평소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 공통점을 발견하다 보니 막판에 영어가 아닌 제2외국어의 영화 속 기능에 대해 질문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너무 늦게 떠올라서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사실 손 댄 언어는 많은데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언어는 별로 없고, 그래도 굳이 따지면 영어나 노어 정도가 아주 조금 남아있다. 내 생각을 한국어처럼 말하기엔 물론 역부족이고. 영화 속 저들은 자기가 느끼는 걸 맘껏 이야기하니 좀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스무살인가 스물 한 살때 친구가 캠퍼스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처가 적힌 초콜릿을 받았단 이야기를 노어로 써서 올린 적이 있다. 흐에?! 하면서 지나갔는데, 지금 보니 아직도 노어만큼이나 아주 조금만 들키고 싶은 비밀을 얘기하는 데 최적화된 언어는 없단 생각이 든다.


외국어는 세상의 확장이라고 보통 말을 하는데 사실 세상의 확장이기도 하지만 비밀의 확장을 내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아예 안 들키고 싶은 이야기라면 말을 아예 안 하거나 암호를 만들겠지만, 조금만 드러내고 싶은 비밀이란 우리 모두에게 있고 그 비밀을 확장하고 선택적 공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외국어를 가진다면 주어지는 듯.


유태오는 <로그 인 벨지움> 에서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데,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들은 영어와 한국어가 혼재되는 반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자유와 연대에 대한 혼자만의 갈망은 (어쩌면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개 독일어로 이뤄진다. 그의 유명세와 누리고 있는 풍요에 대한 장면들이 아무리 나왔어도.. 다 가진듯한 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비밀이 있구나 하는 건 독일어를 통해 알았다.


요즘 나는 내 이야기를 한국어로만 해서 의중을 들키고 해석될 여지가 아주 잦다고 보여진다. 영어로 하면? 그 여지가 조금은 줄겠지만.. 그냥 뭔가 손 놓고 지나갔던 노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던 밤이었다 오늘은. 나처럼 소심한 관종은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를 인생에 조금씩 버무려야 인생이 더 재밌어진다고 믿는 사람이니.


그래도 오늘 영화 보고 글 쓰고 친구들과 검열 없는 행복한 대화를 하는 나를 만나 즐거운 하루였다.

12월엔 내가 영화표를 미리 끊어놓고 친구들을 꼬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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