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처음 들인 습관
이다혜 기자의 영화 리뷰 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1월 한달 동안 CGV 씨네 라이브러리에서 열리는 5회차 수업이다.
첫 수업은 기록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수업이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 건 선생님이 가져온 몇 가지 사례들 때문이었다. #bulletjournal 과 #moodcracker, #외면일기 와 #애도일기. (궁금한 사람은 인스타그램 해스태그로 검색해 보기 바란다.) 이 중 내가 시작한 건 불렛저널인데, 이것의 핵심은 '한 눈에 파악하기' 다.
그 날 본 영화를 '오늘 있었던 일'에 쓰는 게 아니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기록하는것. 이것은 글감을 고를 때 유용하다. '올해의 음악'을 선정해야 하는데 12월에 들은 음악만 생각나서 헛헛한 그런 슬픔은 이제 안녕이구나 싶어 집에 가자마자 시작했다. 영화/그 외 영상물/책/음악/커리어/이벤트 이렇게 6개의 페이지를 만들었다. 커리어는 돈 받고 하는 모든 일의 목록이고 이벤트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 대한 나열이다. (이벤트에는 '진호의 롯데 시네마 합격', '집에 식탁이 생겼다!' '동생 재수학원 선행반 등록' 등이 있다.)
외면일기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면을 토해낸 일기도 좋지만 객관적인 사건과 눈에 보이는 바깥의 기록이 때론 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법이다. 감정표현만 하는 사람, 그러니까 재밌다 재미없다 만 말할 줄 아는 사람에게 좋은 훈련이 될 거라고 했다. (당장 한다) 하지만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이 다음이었다. 어떻게 기록해야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그 방법론으로 기자님은 필사를 권했다. 필사라...
그렇게 시작된 필사 덕분에 나는 새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조용하고 조용한. (물론 가장 큰 공을 한 건 인스타그램 비활성화지만) 12월의 어느 날, 이 수업의 참고도서인 <필사의 기초> (저자 조경국) 를 도서관에서 빌릴 때까지만 해도, 아...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이를테면 초격차..) 필사하는 방법에 관한 책까지 읽어야 하나... 절레절레 했지만 결론적으로 올해 읽은 첫 책이 되었다.
필사에서 중요한 건 필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필사를 하기까지의 시간들. 어떤 게 필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고 결정하는 시간들. 책은 산다고 내 것이 되지 않았다. 읽고 밑줄을 그어도 그 때 뿐이었다. 그게 늘 서운했는데, 이렇게 고르고 고른 문장을 따라 쓰고, 다음 날 또 필사하기 위해 공책을 피면서 덩달아 어제 필사한 것을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그렇게 내 마음에 새겨지는게 즐겁다.
성실해 본 적 없는 내가, 영화 리뷰만큼은 꼭 한 번 제대로 써 보고 싶어서,
이번 수업은 숙제를 모두 올려 볼 예정이다.
첫 번째 과제는 다섯 문장을 필사해 오는 것이었다.
(1)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리뷰-
(2)
진심은 나의 내면에 있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는게 아니라, 일단 아무거나 뱉어보고 뱉어진 문장들이 엎치락 뒷치락 하는 모습 속에서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아무말대잔치 연습장이 있는데 그 연습장의 다른 이름은 진심찾기 연습장이다. 내 진심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연습장에 아무말이나 써 놓고 그 연습장을 흔들어 문장들을 섞는다. (연습장이 상자 모양이므로 흔드는 게 가능하다) 의도치 않게 겹친 문장들을 이어본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나의 진심을 혹은 내가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을 발견하고 그 말을 나에게 들려준다.
-문보영 시인의 '시 수업 일기 딜리버리' 마지막 화-
(3)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눈 밝은 동료가 있어 감사했습니다.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 서문-
(4) 습관이 될 때까진 시간과 마음을 내는 수 밖에 없죠
-조경국 필재의 '필사의 기초' 본문-
(5)
조이의 어금니 중 하나는 박하사탕일 것이다
나는 늘 그 안쪽을 열심히 핥아주고 싶었다
조이네 집 아치 위로 무거워지는 장미
조이는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까
-배수연 시인의 <조이와의 키스> 첫 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