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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은 Jan 08. 2019

필사를 시작했다

2019년 처음 들인 습관

이다혜 기자의 영화 리뷰 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1월 한달 동안 CGV 씨네 라이브러리에서 열리는 5회차 수업이다. 


다음 다음 문단을 보고 와서 그림을 읽는다면 더 좋을 거에요


첫 수업은 기록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수업이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 건 선생님이 가져온 몇 가지 사례들 때문이었다. #bulletjournal 과 #moodcracker, #외면일기 와 #애도일기. (궁금한 사람은 인스타그램 해스태그로 검색해 보기 바란다.) 이 중 내가 시작한 건 불렛저널인데, 이것의 핵심은 '한 눈에 파악하기' 다. 


요새 외국에서 유행이라는 bullet journal netflix


그 날 본 영화를 '오늘 있었던 일'에 쓰는 게 아니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기록하는것. 이것은 글감을 고를 때 유용하다. '올해의 음악'을 선정해야 하는데 12월에 들은 음악만 생각나서 헛헛한 그런 슬픔은 이제 안녕이구나 싶어 집에 가자마자 시작했다. 영화/그 외 영상물/책/음악/커리어/이벤트 이렇게 6개의 페이지를 만들었다. 커리어는 돈 받고 하는 모든 일의 목록이고 이벤트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 대한 나열이다. (이벤트에는 '진호의 롯데 시네마 합격', '집에 식탁이 생겼다!' '동생 재수학원 선행반 등록' 등이 있다.)


외면일기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면을 토해낸 일기도 좋지만 객관적인 사건과 눈에 보이는 바깥의 기록이 때론 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법이다. 감정표현만 하는 사람, 그러니까 재밌다 재미없다 만 말할 줄 아는 사람에게 좋은 훈련이 될 거라고 했다. (당장 한다) 하지만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이 다음이었다. 어떻게 기록해야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그 방법론으로 기자님은 필사를 권했다. 필사라...


생각만 해도 하기 시러... 


그렇게 시작된 필사 덕분에 나는 새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조용하고 조용한. (물론 가장 큰 공을 한 건 인스타그램 비활성화지만) 12월의 어느 날, 이 수업의 참고도서인 <필사의 기초> (저자 조경국) 를 도서관에서 빌릴 때까지만 해도, 아...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이를테면 초격차..) 필사하는 방법에 관한 책까지 읽어야 하나... 절레절레 했지만 결론적으로 올해 읽은 첫 책이 되었다. 


필사에서 중요한 건 필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필사를 하기까지의 시간들.  어떤 게 필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고 결정하는 시간들. 책은 산다고 내 것이 되지 않았다. 읽고 밑줄을 그어도 그 때 뿐이었다. 그게 늘 서운했는데, 이렇게 고르고 고른 문장을 따라 쓰고, 다음 날 또 필사하기 위해 공책을 피면서 덩달아 어제 필사한 것을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그렇게 내 마음에 새겨지는게 즐겁다. 


성실해 본 적 없는 내가, 영화 리뷰만큼은 꼭 한 번 제대로 써 보고 싶어서, 

이번 수업은 숙제를 모두 올려 볼 예정이다. 

첫 번째 과제는 다섯 문장을 필사해 오는 것이었다. 



(1)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리뷰-   



(2)

진심은 나의 내면에 있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는게 아니라, 일단 아무거나 뱉어보고 뱉어진 문장들이 엎치락 뒷치락 하는 모습 속에서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아무말대잔치 연습장이 있는데 그 연습장의 다른 이름은 진심찾기 연습장이다. 내 진심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연습장에 아무말이나 써 놓고 그 연습장을 흔들어 문장들을 섞는다. (연습장이 상자 모양이므로  흔드는 게 가능하다) 의도치 않게 겹친 문장들을 이어본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나의 진심을 혹은 내가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을 발견하고 그 말을 나에게 들려준다.  


-문보영 시인의 '시 수업 일기 딜리버리' 마지막 화-



(3)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눈 밝은 동료가 있어 감사했습니다.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 서문-

 

 

(4) 습관이 될 때까진 시간과 마음을 내는 수 밖에 없죠 


-조경국 필재의 '필사의 기초' 본문-  



(5) 

조이의 어금니 중 하나는 박하사탕일 것이다

나는 늘 그 안쪽을 열심히 핥아주고 싶었다

조이네 집 아치 위로 무거워지는 장미

조이는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까 


-배수연 시인의 <조이와의 키스> 첫 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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