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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은 May 26. 2018

우리 서로 말 놓을까요?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 당신을 위해

5년 만에 MBC 공채가 떴다. 서류전형 없이 지원자 모두 필기시험을 치르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시험장은 인산인해였다. 1교시 상식 시험이 끝나고 2교시 작문 시험 제시어가 공개됐다.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을 쓰시오.’ 여기서 비밀이란 사건이 아닌 ‘유일무이한 생각’이었다.


다들 어떤 비밀을 썼을까?  채점하는 감독관은 세상의 비밀을 좀 알게 됐으려나! 나는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돈이 안 들면서도 효과가 좋은,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가지에 관해 썼다. 즐겁게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해 공유하려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할 것!


나를 내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문화적으로 정해져 있다. 나랑 동갑으로 간주되거나 나보다 일찍 태어난 사람.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은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게 이 세계의 예의다. 예의 바른 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이를 묻고, 족보 정리를 하지 않으면 대화를 시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깍듯하게 존대했다. 언니, 오빠라 부르며 고분고분 잘 따랐다. 나이가 어리면 자연스레 하대했다. 다섯 살이 네 살에게, 열다섯 살이 열네 살에게 그랬다. 가끔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집에 돌아오는 날엔 더욱 그랬다. 평생 서로 모르고 살다가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높은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한 걸까? 아무리 예의를 지킨다 해도 ‘언니’라 부르는 것과 ‘야’라 부르는 건 달랐다. 한쪽은 은근슬쩍 말을 놓아도 되고, 다른 한쪽은 허락을 받아야 했다. 동등한 호칭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족보 정리 병’이 낫게 된 건 더 이상 이게 예의가 아닌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성은 언니’ ‘성은 누나’가 아닌 ‘성은아’로 말이다. 기존에 아는 사이에선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관계 맺는 사람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대학 시절 경험한 ‘반말의 마법’도 한몫했다. 학번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아리에서 삼수생이었던 난 두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기였다. 동아리 규칙상 그들은 나를 ‘성은아’라고 불러야 했다. 이내 익숙해졌고, 우린 마법처럼 서로의 나이를 잊게 되었다. 틀린 걸 지적하는 게 버릇없는 일이 아니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나이만큼 세월이 주는 깨달음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인생의 답을 찾아 헤매는 존재였다.


요즘 이름에 ‘님’자를 붙여 상호 존대하는 문화가 유행이다. 멋지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습관적으로 언니, 오빠라 부를 때가 많다. 어머님, 아버님 같은 가족적 호칭을 쓸 때도 있고, 상대의 직업을 호칭으로 부를 때도 있다. 그게 나쁘다 할 순 없지만 한 번쯤은 상대에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 물어 보는 건 어떨까.

혹시 당신이 연장자라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도 한 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이건 한국사회에서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기울어진 언어에 너무 오래 편안함을 느낀 건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내가 아는 비밀은 여기까지!  



*이 글은 동아일보 2030세상 지면의 2018년 5월 23일자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이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이 생기셨다면 아래의 자료들을 참고해주세요



1. 2014년 6월 페이스북 지인의 글

처음 이런 글을 올렸을 때 친구 김정우가 자신의 선배의 페북에 나를 태그해주었다.


나이의 많음에 따른 우월적 언어 사용 포기 선언            

저보다 나이가 적은 분들께 알립니다. 저는 나이의 많음에서 오는 "하는 말은 반말 듣는 말은 존댓말" 격인 비대칭적 우월적 언어 사용을 포기함을 선언합니다. 저는 이것을 언어평등주의의 실천 방안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어가 정말로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기 위한 존댓말,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한 반말은 둘 다 한국어가 가진 독특한 매력이며 한국어의 사용을 다채롭고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외식을 하거나 쇼핑을 할 때 웨이터나 점원의 섬세하고 사려 깊은 존댓말 사용 하나로도 훨씬 양질의 서비스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만 보아도 존댓말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처음 만나서 어색하던 사이의 친구들과 서로 나이가 같은 것을 확인하고 존댓말 대신 반말을 쓰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느꼈던 친근함은 반말이 한국어 사용자들을 얼마나 잘 융화시켜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2014년 현재 한국어의 사용 문화를 보면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른 존댓말과 반말의 비대칭적 사용을 당연시함으로써 우리는 한국어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문화가 세대 간의 단절과 나아가서 비효율적 의사소통에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이의 많음이 더 많은 발언권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존경할만한 인품과 뛰어난 생각이 더 많은 발언권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 저는 저보다 나이가 적은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저와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저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아 주세요. 특히 우리가 서로 알게 되고 친구가 되기 시작하면 사적인 대화에서 문장의 끝에 '-셨나요' 등의 어떤 경어체(존댓말) 어미도 사용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호칭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는 저보다 나이가 적은 분들에게서도 친구라면 제가 '규원', '규원아' 등의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상호 간의 불편함과 생각지 못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친구로서 그러한 불편함을 함께 해결해나갔으면 합니다. 불편하시다면 호칭은 익숙해질 때까지 '형', '오빠' 등의 호칭을 섞어 쓰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누구는 윗사람 누구는 아랫사람 대신 서로 친구가 됩시다.


더 많은 분들이 나이에서 당연하게 오는 것으로 흔히 여겨지는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행동하는 사람이 불평하는 사람보다 영향력이 있다는 판단에 이 생각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비대칭적 언어 사용에서 초래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통감하는 분들께서는 이 움직임에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2014/6/30 최규원


2. 닷페이스 2018년 3월 영상


3. 2018년 5월 씨네 21 심보선 칼럼


4. 2017년 10월 한국일보 장강명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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