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선물 받을 땐 내 것이 아닌 것 같다가, 12월이 되면 그 무엇보다 애틋해지는 게 있다. 바로 ‘내 나이’다. 한 살 나이를 먹은 지 스무 날이 지났다. 다들 잘 적응하고 있는지.
나는 서른이 되었다. 동갑내기 여자친구들의 카톡방에선 오늘도 곡소리가 났다. “회사에서 누가 나이를 물어봐서 서른이라 했는데 손에 땀이 나더라”, “나도 서른이라고 놀림 당함… 당황…”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다. 나이로 후려치기 당하는 데 익숙한 여성들은 자주 원인 모를 수치심에 시달린다.
동생들은 묻는다. 서른이 되니까 기분이 어떠냐고. 그 질문을 좀 더 날것으로 번역한다면 이거다. ‘세상의 후려치기에 너 역시 비켜갈 순 없을 텐데. 어떻게 견디는지?’ 나는 이렇게 견뎠다.
22세. 그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늙은 기분으로 살았다. 삼수를 했고, 모두가 나를 언니, 누나라고 불렀다. 그 상황에서 나를 구한 건 학번제 동아리였다. 나이가 달라도 학번이 같으면 똑같이 대하는 그곳에서 나는 드디어! 같은 학번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다만 또 다른 무례를 감내해야만 했는데,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가끔씩 나이로 사람을 놀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싶었지만 다들 웃으니까 따라 웃었다.
23세부터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시달렸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말. 12월 25일이 지나면 더 이상 팔리지 않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처럼 25세가 넘으면 값이 떨어진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형적인 여성혐오 표현이다.
24세가 되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곧 있으면 닥쳐올 ‘반오십’(50세의 절반이라는 뜻으로 25세를 이르는 말)에 대한 공포가 세상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과 오십 살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땐 정말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우연히 23세 때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당시 나보다 어린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이었는데, 한참을 들여다 본 기억이 난다. ‘내가 이렇게 예뻤었나?’ 사진 속엔 생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23세의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공포에 떨었던 어린 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그러지 말걸. 그럴 시간에 나 좀 예뻐해 줄걸.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 상처 주는 게 적어도 나여서는 안 되지 않나.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게 방해하는 것들을 삶에서 걸러낼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것이.
올해 서른이 된 나의 소감은 여기까지이다.
다음 나이는 아직 살아 보지 못해, 58년생 시인의 시를 가져왔다. 제목은 ‘송년회’.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아마도)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아직은 어색한 내 나이, 활짝 한 번 껴안고 1월을 마무리하자.
친구들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