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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엔카페인 Jan 20. 2021

이념은 사람을 위하는가,
사람의 위에 있는가?

체르노빌&피아니스트 감상평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각자가 개개인으로 혼자 있을 땐 약하지만, 여럿이 있을땐 집단으로서 최고의 효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나오는게 시스템, 즉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효율적인" 사회 운영을 위해 시스템을 정립한다. 여기서 크게 영향을 끼치는게 이념이고 그 이념에 따라 권력을 배분한거나 실제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정치이다. 공산주의, 나치즘 등 21세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이념은 그 당시의 사회에선 정말 효과적인 "시스템" 이기 때문에  그 이념과 시스템을 채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체르노빌이란 드라마와 피아니스트라는 영화에서 바라본 [이념]의 존재는 인간을 잡아삼킨 무서운 프레임이었다. 분명 인간은 효율을 위해 이념을 따르고, 시스템을 형성하지만 그 시스템에 잡아먹힌 인간은 로봇보다 더욱 잔혹하고, 더 잔인하며, 더 무차별하였다.



 

보는 내내 맨정신으로 보기 어려워 맥주를 옆에 두고 보았다. 사람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온갖 고통속에 피부가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썩어버리고(이마저도 순화한 것이라고 한다), 대사상으로만 나오지만 얼굴이 녹아내려 형태를 찾기 힘들었던 연구원도 있었다. 소련의 계획 도시였던 그곳은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곳은 돌아갈 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최악의 현실과 수치를 말하는 레가소프 교수의 말은 이념과과 정치적 권력을 앞세운 정부 관료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설사 그것이 옳다 해도, 그것은 정부의 실패를 인정하라는 이야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이기 전에 소련이었던 이 나라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당의 체제를 흔든다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그들 역시도 스스로를 그렇게 믿었다. 그 대가가 수만명의 목숨이었다 해도 정부는 초반에도, 막판 재판에도 사실을 축소하고, 은폐하려하며, 적당히 넘어가고자 한다. 왜? 그것이 이념에 대한 도전, 체제의 승리를 이끄는 목적 조기달성이라는 국가 목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방사능이 터진 직후 소집된 관료회의에서의 안일하고 문제없다는 분위기는 관료주의, 이념의 공포가 어디까지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거짓말의 대가는 너무나도 끔찍하였다. 원자력 회로에 결함이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 사람이 쓰러지고 피가 곪아가는 상황이었음에도 일단 상황을 축소하고자 하는 모습. 그리고 원전 폭발 자체를 덮고자하는 모습은 눈뜨고 보기 힘든 상황 속에서 더 영상을 무겁게 만든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진실을 눈감고 거짓을 택했을까. 소련이라는 국가와 이념때문이었지 않을까? 


소련은 냉전시대 미국과 견주었던 강대국이었으며, 소련의 성공은 곧 사회주의의 성공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원자력 폭발이란 단순 원자력으로 인한 인재가 아니라, 그들의 이념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공포였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련은 체르노빌 이후 해체되며 러시아 및 여러 국가들도 찢어졌다. 그들이 숨기고 막고자했던건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무너지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듯, 소련은 미국을 넘어서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해왔으며, 여러 분야에서 미국을 앞선다는 건 곧 소련의 승리, 더 나아가 사회주의의 승리였다. 결국 소련이 붕괴되며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크게 꺾였지만 말이다.


사람이 있어야 이념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념은 사람의 위에 있다.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라면 사람의 목숨은 그저 숫자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체르노빌 원전사고 공식 사망자는 여전히 31명밖에 되지 않는다. 수만명이 희생되었고, 수만명이 여전히 원자력 피폭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목숨은 잊혀진다. 우리는 이마저도 [추정]하며 분개할 뿐이다. 레가소프 교수가 죽기 전 던진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What is the cost of lies?)" 라는 물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목은 피아니스트. 그러나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전체 2시간 30분 영화중 30분을 채 넘기지 못한다. 영화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고 힘들다. 마찬가지로 맨정신으로 보기 힘들었다. 전쟁의 아래에 군인,경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업은 쓸모가 없어진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던 주인공 폴란드인 슈펠만도 당연하게 직업을 잃어버리고 떠돌며 굶주리고 병에 걸리며,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의 중심에 선다.


홀로코스트에서 유태인들은 극악같은 삶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자본 상한제, 팔뚝에 표시하는 유태인 표시는 가벼운 수준이다. 무자비한 총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굶주렸거나 죽어서 거리 구석에 놓여있는 사람들,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로 끌려가고, 도망쳤다 하더라도 숨어서 살아야하는 불쌍한 삶은 이것이 정녕 사람이 버틸수 있는 삶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2차세계대전에서 패잔국이 된 독일과 독일군은 끝내 입장이 뒤바뀐 삶을 살게된다. 영화 내내 수염이 덥수룩했고 통조림을 깔 힘조차 없던 슈필만과, 영화 마지막 전쟁이 끝난 뒤 말끔해진 피아니스트로의 삶을 사는 슈필만의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영화의 극적 순간은 슈필만과 독일 장교의 만남으로 커진다. 장장 1시간 반이 넘게 들려오지 않던 피아노 소리가 영화속에서 울려퍼지며, 이념과 이념의 만남대신 사람대 사람으로 그들은 만난다. 안타깝게도 독일 장교는 좋은 끝을 맺지 못하지만, 영화 내의 극적 순간임은 분명하다. 앞의 수많은 독일 군이 유태인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생각해보면 장면은 더욱 극적으로 남는다.


물론 그들은 이번 학기 정치심리학에서 배운 것처럼 자신들이 놓여있는 "상황"에 의해 유태인을 궁지로 밀어넣었을 수 있다(상황주의 관점이라고 보통 칭한다). 한나 이렌트와 스텐리 밀그램이 이야기하듯, 그들은 어쩌면 명령 수행 결과에 대해 사고, 판단하지 않았을 수 있다. 명령과 상황에 불복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왜 만들어졌을까? 답은 이념이다. 인간이 만든 상황 속에서 인간은 지배 당한다. 체르노빌과 마찬가지로 체제를 위한 전체주의는 유태인을 같은 사람으로 보는게 아닌 경멸해야하고, 죽여야하며, 짓밟아야할 "표적, 대상"이었던 것이다. 



힘을 가진 소수가 목적을 갖고 힘을 이용하는 순간, 다수는 그에 흔들린다. 왜? 그들은 그들의 이념에 맞는 이야기만 믿고, 흘려보내며, 퍼트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들의 주장을 믿게되고, 그들의 이념에 동조하며, 인간 위의 이념을 묵인한다. 거짓의 대가는 말하기 버거울 정도로 참혹하며, 무비판적인 전체주의는 거대한 폭력을 낳는다. 


앞서 보았듯 이념은 인간의 시스템상 용이함을 위해 생겨난다. 즉 이념은 본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순간에서 이념이 인간 [위에] 있는 순간을 마주한다. 영화, 드라마 두편으로 볼 것도 없이 우리는 수많은 순간에서 이념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를 발견한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나 조차도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일지 모른다.


그러기에 공부해야하며, 그러기에 알아야하고, 그러기에 올바른 판단을 해야한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 스스로 올바른 판단이 나오며, 그 판단한대로 이념을 다루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두편의 영상물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아마 꽤나 오랫동안 남아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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