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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지 않으면 시간은 빨리 간다. 반대로 기다리면 시간은 더디고 더디다. 기다리는 시간은 초침과 같다. 1초. 2초. 3초. 4초. 그 이상으로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바닥부터 하나씩 쌓듯. 하나 그리고 둘. 셋, 넷. 쌓아간다.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 모두에게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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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하면서 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체취. 어제 먹었던 음식과 부대끼던 사람들의 냄새들. 물에 담가 문지르면 그 체취는 사라진다. 과거로 되돌린다. 리셋. 하지만 아주 처음, 그때로 돌아갈 순 없다. 엉켜버린 시간 어딘가로. 빨래는 시간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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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은 어두웠다. 깜빡이를 켜자 주변의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에 잠겨있던 차들, 4298번, 8125번, 5231번이 웅크린 표범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와 마주한 헤드램프.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소방 배관. 이 공간의 분위기. 그곳엔 나만 모르는 어떤 규칙이 있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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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틈 사이로 흐르는 모래처럼 시간을 쥐고 있다. 내 생각은 종종 시간이란 주제에서 맴돌고 나라는 건 언제든지 그 속에서 소멸한다. 누군가 이 유한성 때문에 삶이 아름답다 했다. 난 시간에 대범한 편이지만 때론 이렇게 구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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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은 유독 치열했다. 창밖에 걸어뒀던 송악 나무 덩굴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버렸다. 3월이 되고 나서야 햇살은 봄빛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 피곤했던 가지 위에 노랗고 밝은 빛을 쏟아냈다. 앙상하고 홀쭉하게 마른 가지가 뒤늦게 친절해진 바람에 흩날린다. 그 휴식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안도감이 스며든다. 상실의 기억과 함께 또 한 번의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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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의 시간은 멈춰 있다. 제각각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 순간 이후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동상의 위세보다 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그 침묵이 더 경이롭다. 얼핏 죽음이 연상된다. 침묵은 어쩌면 죽음의 메타포인 것 같다. 그래서 난 동상을 보면 왠지 숙연해진다. 북한남에 가면 어느 빌딩 앞을 가득 메운 동상이 있다. 사자는 나무속에 숨어 있고 개구리는 사자 옆에 앉아있다. 기린은 고개를 쳐들고 나뭇잎을 먹으려 한다. 그들의 습성은 굳어진 돌 속에 갇혀있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허락되지 않는다. 조각가는 생명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시간을 뺏어버렸다. 신의 장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