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선생님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육 개월 간의 소중한 휴직을 마무리하며 이제야 사람들을 조금씩 만나고 있다. 휴직을 시작하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모토로 삼고, 일상의 감각 회복과 휴식에만 전념했다. 나답지 않게 사람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고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내게는 이제, 시간이 생겼을 때 여가를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심심하면 책을 읽고, 요가로 몸을 풀고, 종종 애플파이를 구워 먹기도 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조금 더 향기롭고 근사하게 일상을 채워나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 만남의 횟수는 자연스레 줄었지만, 그 깊이와 향기는 더 진해졌다고 믿는다.
어제 사랑하는 장영옥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초등학생 때까지 인천 외가에서 살다가, 중학생이 되며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외톨이처럼 지낼까 걱정한 이모는 본인의 고등학교 동창이던 장영옥 선생님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선생님은 이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개인 레슨을 하고 계셨는데, 마침 우리 집 건너편에 사시니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워보라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긴 있었지만, 당시 나는 피아노를 정말 싫어했다. 피아노 건반을 기계적으로 두드릴 때면, 차라리 키보드로 한글을 타이핑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고 즐겁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모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던 나는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아직도 레슨 첫 시간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푸른색 표지의 하논을 꺼내오시더니, 첫 장을 펼치셨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여러 번 쳐봤던,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끝없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 연습곡 1번. 선생님은 “이 단순한 연습곡조차 하나의 작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 작품을 우리 나름의 해석을 붙여서 표현해 보자면서, 파도가 몰아치듯 올라갔다가 내려오듯이 연주하시며, 곡에 담긴 정서를 한 겹 씩 풀어주셨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수십 번이나 기계적으로만 쳤던 하논 1번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파도의 느낌으로 살아났을 때 처음으로 피아노가 재미있어졌다. 지금도 선생님을 뵐 때면 “하논이 재미있다니, 그땐 정말 충격이었어요.”라며 함께 웃곤 한다.
5년 동안 선생님께 정말 재미있게 피아노를 배웠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논조차 재미있었는데, 하물며 쇼팽, 베토벤, 드뷔시 같은 작곡가들의 곡은 신세계였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의 자유악기 연주평가를 앞두고 선생님은 “쇼팽의 야상곡이나 베토벤의 월광은 너무 흔해 조금만 틀려도 티가 난다.”며 대신 쇼팽의 화려한 왈츠(Waltz in E minor No. 14)를 골라주셨다. 선생님의 치밀한 전략 덕분에 공부도 잘하는데, 피아노도 잘 치는 학생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하루 종일 수학 문제를 풀다가 징글징글 짜증이 올라오면, 혼자 강당에 가서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풀기도 했다.
고3이 되어서도 계속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아토야. 너 이제 대입 준비해야 하지 않니? 공부에 집중하렴.” 이라며 선생님이 먼저 피아노 레슨을 끝내셨다. 아니, 학생이 괜찮다는데 선생님이 학생을 먼저 자르는 법이 어디 있냐며 귀여운 항의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즈음, 선생님은 교회 오르간 연주에 더 집중하려 하셨고, 내게는 피아노 악보집 스무 권가량을 물려주셨다. 이십 년 가까이 책장에 고이 모셔두다가, 작년에 아들의 피아노학원 선생님께 잘 물려드렸다. 왠지 그 악보집의 진짜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선생님의 사랑이 진정한 음악인과 그 제자들에게 잘 이어지길 바란다. (그 인연으로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이 내 브런치 애독자가 되셨으니 내게는 남는 장사다! ㅎㅎ) 선생님이 심어주신 음악과의 소중한 인연은 피아노 레슨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덕분에 대학에서는 재즈밴드를 하며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경주에 가서는 겁 없이 가야금이란 악기도 배워볼 수 있었다. 한 장의 단조로운 악보도 소중한 작품으로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를 배웠기에, 음악을 동반자로 삼아 지금까지 지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종종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지만, 이모의 임종과 장례를 지내며 다시 연락이 닿았다. 선생님은 내가 레슨 받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새벽 예배에 나가시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셨고, 일흔이 훌쩍 넘으신 최근까지도 성가대 반주를 맡아하실 정도로 교회 활동에 진심인 분이었다. 이모의 장례를 불교식 49재로 치르며 혹시 오실까 여쭤봤는데, 기꺼이 오랜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 하시겠다며 선생님은 먼 여주의 절까지 와주셨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를 듣고 선생님이 무엇인지 물으셨다. 기독교 신자이신 선생님께 괜히 불편함을 드린 건 아닐까 멈칫하는 순간 “이모가 잘 들을 수 있게 더 소리를 키워보라”라고 하셨다. 그제야 편견을 가진 쪽은 나였음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50년 지기인 이모를 먼저 떠나보낸 슬픈 옆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이모를 잘 돌봐달라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 선생님은 정말 아름다운 신앙인이시구나, 선생님을 통해 기독교를 만난 것은 참 다행이었다.
휴직의 끝자락, 선생님 얼굴은 꼭 뵙고 싶어 찾아갔다. 선생님은 늘 그렇듯 인자하고 따스하게 나를 맞이하셨다. 브런치 카페의 햇살 가득한 창가에 자리 잡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앞에 두었다. 선생님은 복직하는 제자가 앞으로 건강하게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진심을 다해 기도해 주셨다. 그 간절한 마음이 환하고 따스하게 전해졌다. 나도 선생님처럼 두 손을 모으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며, 마지막에는 함께 낮게 읊조렸다. “아멘.” 햇살 속에서 우리 둘을 하얀 빛이 감싸는 듯 평온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보이는 우리의 모든 몸짓들은 사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빛으로 연결되어 있다. 종교의 이름은 다르더라도 결국 우리가 바라는 건 같다. 누군가의 행복을 빌고, 서로의 삶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 저녁 노을빛이 아름답게 들어오는 성당에서, 신성을 느끼며 남겼던 한 불교수행자의 다소 어설픈 기도문으로 이 글을 마친다.
주여. 부디 이 연약한 사람들을 굽어살펴 주옵소서.
그가 어디에 있든 따스한 행복을 주시옵고,
저에게도 그 따스한 행복을 나눠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가 저를 위해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옵소서.
삶이 우리를 배신하는 양,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조차, 우리 곁을 지키는 천사들의 존재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는 이 모든 순간이
진실로 은총임을 늘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ttps://www.youtube.com/watch?v=CnfW6MQTiS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