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매몰된 나를 다시 꺼내는 작업 중"
여섯 시가 땡!
되면 집에 갈 수 있는 직장이 있는가 하면,
하염없이 직원들을 잡아두고 절대 안 보내주는 나쁜 직장도 있죠.
오늘 만나 볼 주인공은 출근 5일 중 4번에 야근을 하며 회사에 젊음을 바치고 있는 32살 ㅎ씨입니다.
3년 동안 회사에서 일하면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
최근 그는 옛날의 자신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데요
매일 일이라는 개미지옥에 시달리는 ㅎ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실래요?
-독자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공공기관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프로야근러입니다. 나이는 32살이고요. 회사가 작아서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세 직장 동료가 알아차릴 수 있어서요. 정부의 제도, 정책 방향을 특정 전문가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높은 책임 의식이 필요한 직업 같아요. 현재 업무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으세요?
"음, 복잡하네요. 가끔은 만족하는데, 만족감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아요. 정확히 '나의 일'이라고 여길 수 있는 업무가 거의 없거든요. 상사가 떠 넘긴 일들을 해내야 하고, 하고 나면 쌓여있는 제 일을 악착같이 처리하고. 일은 많이 하는데 만족감이 없어서 매일 피곤하고 심리적으로도 허기가 많이 져요."
-남의 일에 내 일까지 하려면 몸이 두 개는 돼야겠는데요.
"네. 그래서 야근을 많이 해요. 5일 중에 4번은 야근을 해요. 보통 오후 11시~12시에 퇴근해요. "
-회사에서 산다고 봐야 되네요. 근데 요즘 뉴스 보면 공무원들 업무 시간 줄인다고 얘기 많이 나오던데요. 공무원은 아니지만 공공기관인데, 업무시간 축소 이런 게 해당이 안되나 봐요?
"회사에서는 야근 축소 지침이 내려왔어요. 근데.. 일이 정말 많아서 무조건 야근해야 되거든요. 예전에는 야근하면 야근 수당이라도 받았어요. 근데 요즘에는 정부에서 야근하지 말라고 하니까, 회사에서 야근수당 올리지 말고 일하라고 해요. 그래서 요즘은 야근 수당 올리는 거 눈치 많이 보여서 그냥 안 올리고 야근해요."
-참, 아이러니하네요. 회사원들 편하자고 한 정책인데 결국 피해를 보는 건 회사원 들인 거니까요. 상사들은 뭐라고 해요? 야근하지 말고 일찍 가라고 그렇게 하지 않아요?
"무언의 압박이 들어와요. 예를 들어 일이 넘쳐나는데 또 일을 주는 거죠. 그래서 일이 너무 많아서 기간 내에 못한다고 하면 너무 편하게 일하려고 하는 건 보기 좋지 않다고 말하죠. 결국 야근하라는 거죠."
-으.. 저도 회사 다닐 때, 상사가 퇴근할 시간에 일 주거나 주말에 전화해서 일 시킬 때 진짜 화를 넘어 분노까지 느꼈었어요. 그래도 이런 상황을 버틸 수 있는 게 역설적이게도 상사들이었거든요. 상사들한테 하소연도 하고 또 위로도 받고요.
"저는 그런 거 포기했어요. 이 회사에서는 내가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예전에 일이 너무 많이 힘들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상사가 뭐랬는지 아세요. 내가 너랑 유대관계도 없고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나한테 힘들다고 하냐고. 난 너보다 힘들다. 나는 너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진짜 회사에서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저 말을 들은 이후로는 회사에는 힘들다고 얘기 안 해요."
-상사가 직원들을 챙길 줄을 모르나 봐요? 직장의 리더인데, 아래 직원들을 이끌어가거나 이런 게 전혀 없네요. 진짜 삭막하네요.
"그래서 요즘은 그냥 묵묵히 따라가고 있어요. 근데 요즘은 많이 힘들어서 그런지,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대체 뭐하는 거지 싶어요. 성취감도 없이 그냥 꼭두각시처럼 일만 하는. 내가 이러려고 취업에 그렇게 목을 매었나 싶고."
-그럴 때 이직 생각 들지 않아요? 저는 한 4년 회사 생활하면서 우울증, 폭식증, 디스크 온갖 병이란 병은 다 걸려서 그만두고 나왔는데요.
"음,, 취업을 굉장히 힘들게 했어요. 해외 이민까지 생각했을 정도로요. 취업 트라우마가 굉장히 크거든요. 굉장히 힘들게 취업을 해서 직장에 들어왔고, 3년이 금방 가더라고요. 근데 아직도 취업 때 힘들었던 기억으로 인해 이직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에 취업을 조금 쉽게 했다면 이직을 생각해볼 수 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지금 제 자신이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맞아요. 요즘 취업 너무 힘들잖아요. 그렇게 어렵게 들어왔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 이런 마음이 클 수밖에 없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나가는 분들이 진짜 대단한 거예요.
"맞아요. 제 생각에는 회사도 이런 걸 알고 있어요 이 마음을 이용하는 거죠. 너네가 못하면 나가라. 너네보다 잘할 사람은 많다 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에요. 이왕 회사 들어온 거 같이 잘해보자 이게 아니라 너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이런 거랄까..? 그래서 이 분위기를 버티는 사람은 계속 버티고 나갈 사람은 나가고. 그러니 회사가 이렇게 야근하는 문화로 정착이 된 거죠"
-휴, 그렇게 일하다 보면 회사의 부당함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걸 바꿔보자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혹시 현재 회사 문화를 보면서 나는 절대 안 해야지 결심한 것들 있어요?
"실천한다고는 하는데 별거 없어요. 그냥 내 일은 내가 하는 거예요. 후임한테는 니 일만 하고, 나는 내 일만 하면 돼 이렇게요. "
-우와, 일 안 떠넘기는 선배. 그런 선배 진짜 좋죠. ㅎ씨 같은 사람이 한 두 명씩 늘어나고, 그 후배도 또 그걸 배워서 그렇게 하다 보면 이 문화가 바뀌지 않을까요?
" 안 바뀔걸요? 문화를 바꾼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조직은 개인보다 훨씬 거대하고 단단해요. 회사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곳이라 유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이 거대한 조직의 문화를 한 번에 깨버리지 않는 한, 저 같은 빗방울은 그냥 아무 영향도 못 미치는 것 같아요. 일단 제 상사들은 본인들이 야근하면 저보고 왜 먼저 가냐고 해요. 가끔은 컴퓨터만 켜놓고 카톡 하면서 상사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저는 이런 게 너무 싫어서 후배한테 일 끝나면 그냥 가라고 해요. 그런데 상사들은 너는 왜 후배를 먼저 보내냐고. 너는 선배가 일하는데 어디 가냐고 이렇게 말하면서 서로를 민망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저런 사람들이 최소 10년은 더 이 직장에 다닐 텐데. 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절대 못 변하죠. "
-어휴. 듣는 내가 다 짜증이 솟구친다. 이런 환경, 사람들하고 일하면 진짜 무기력증에 빠질 것 같아요.
"맞아요. 자존감도 진짜 많이 낮아졌어요. 그래서 요즘은 자기합리화를 진짜 많이 하거든요. 나는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이런 거요. 매번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하고 우월감 느끼고.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 거죠. 근데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자존감이 떨어지더라고요. "
- 정말 회사를 그만둘 수도, 그렇다고 이걸 어떻게 고칠 수도 없고요. 회사 생활 어떻게 버티는 거예요?
"가족들이랑 여자 친구 생각하면서도 버텨요. 지금의 나는 이렇게 힘들지만, 내가 회사를 다님으로써 생각할 수 있는 미래, 또 현재가 있으니까요. 또 최근에는 소소하지만 자기계발도 시작했어요. 회사 생활 끝나고 하는 일이라서 힘들 만도 한데, 밤 12시에 퇴근해도 잠깐이라도 뭘 하고 자면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다음날도 굉장히 힘이 나요. "
-맞아요. 일 외에 내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취미가 있는 건 좋은 거예요. 그런 일을 할 때면 오히려 에너지가 비워지는 게 아니라 채워지는 느낌이잖아요.
"네. 일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면서 최근 들어 마인드 컨트롤이 절실해졌거든요. 처음에는 자괴감만 들었어요. 일이 나를 삼키고 있는 느낌..? 그래서 지금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고 있어요. 나를 소중하게 여기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일과 나 사이의 중심이 재정립되가는 것 같아요. 요즘은 운동이랄 것도 없는데, 팔 굽혀 펴기도 하면서 체력도 키우고 있어요. 처음엔 열개만 해도 숨이 찼는데 지금은 삼십 개씩 해도 거뜬해요. 유튜브 보면서 피아노도 따라 치려고 노력하고요. 너무 소소한 가요? 하하
그래도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자존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일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 가치를 다시 곱씹을 때마다 마음이 평온 해져요.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되게 많이 주는 것 같아요."
-내일 회사를 때려치운다! 혹은 이직한다! 등등 조금 밝고 긍정적으로 인터뷰를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ㅎㅎ, 이게 우리들 현실인 것 같아요.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위안과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리고 ㅎ씨, 최근에 자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는 것. 굉장히 그뤠잇! 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렇게 나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회사 생활에서의 중심도 잡을 수 있고,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혹시 야근으로 힘들어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인터뷰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건 아까도 말한 건데.. 회사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회초년생 때 이런 얘기를 못 들어봤거든요. 너는 가치 있는 존재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들이요. 또 이게 말은 쉬운데 정말 마음으로 깨닫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저처럼 회사생활로 인해 자존감, 자신감 전부 없어진 분들한테 나를 사랑하라고, 이 마음 잊으면 안 된다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