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지 Sep 09. 2017

[수강후기] 노동기본권: 현실과 과제

인권감수성, 이성적 대처방식의 부재로 인한 지난한 싸움

 -- 서울대 인권센터 열린인권강좌 4회차. 이창근 민주노총 정책실장의 강의를 듣고.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1인당 28.6%의 실질 GDP 성장을 이룬 반면 국민들이 영위하는 삶의 질은 ‘11%’ 증가한 것에 그쳤다. 특히 가족공동체, 고용임금부문에서 삶의 질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공동체는 마이너스 2%의 성장 기록). 임금인상은 이러한 총체적 성장지수 중에서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는데 이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한마디로, 기업은 더 잘 되고 개인은 더 망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소득상위 10%가 전체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는 불가피하게 많은 통계자료들이 제시되는데, 강사분도 지적하시듯 하나의 지표에 대해 여러 개의 다른 그래프가 제시되기 마련이다. 기준점, 변수, 영역과 정의를 각기 다르게 잡을 때마다 숫자도 달라지고 그에 대한 해석이 판이해진다. 통계의 함정인 것이다. 통계의 정치학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강사: 이 중에서 한국은행이 발표한 통계는 어떤 색 그래프라고 생각하세요? 청중: 청색선이요. 세 개 중 가장 긍적적이고 희망적인 결과를 담고 있으니까요.)


자, 강사분은 강성노조의 표상, 대기업 공장노조의 입장대변에만 주력하는 게 아니냐, 는 의구심의 표적인 민주노총의 정책실장이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나라가 처한 ‘노동인권’의 현실이 참 기형적인 모양새라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인권사수' 에 성역이 둘러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반면, 세계최장 노동시간, 비정규직, 저임금 등의 기본사항들이 '개선'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 기형적인 모양, 이라는 표현에서 나는 몇 개의 개인적 경험들을 근거로 든다. 국내 대기업을 그만 두면서 나는 어떤 관행(?)에 의해 사측이 베푸는 ‘호혜’ 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때는 당연한 혜택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는 일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후 잠시 학교기관의 인사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즉 사측의 입장에서 느꼈던 노동자, 근로자에 대한 관점들 그리고 더 나중에는 그 기관과 관련된 어떤 소송에 가담하여 정부 측을 돕는(답시고) 매우 적극적인 일을 수행하면서 보고 겪었던 것들이 그 근거들이다. 그 경험 중 하나로, 어떤 (조직에 '위해행위'를 한) 직원을 해고하는 과정이 있었다. 직원의 해고에 있어 한국은 매우 ‘노동자 친화적인’ 노동법(근로기준법)에 준해야 한다. *참고 1. 또한, 때로 ‘최신’ 인권현안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그 부작용으로 인한 어이없는 해석과 적용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최근에는 성범죄관련 사안들이 그렇다. 관련 사안 전반에 대한 사회일반의 빈약한 인식, 독특한 위계문화, 공동체 지향성, 지나친 경쟁주의, 이기적 함구주의와 감정적 폭로주의의 양극성, 다양한 사례와 판례의 부재 속에 의아스럽고 기이한 사건분석과 해석, 이해와 판결들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오늘의 강의내용으로 돌아가본다. 바로 오늘과 내일, 주말까지 대한민국 노동계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바로 ‘최저임금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 이다. 민노총 관계자분은 만 원으로 합의안이 타결될 수 있도록 응원해달라고 했다. 최저임금, 즉 시급 만원에 대한 정당성은 생계비와 직결된다. 1인 가구의 월 생활비가 180만원으로 상정될 때 시급 만원은 월209만원의 생계비가 된다. 문제는 1인이 벌어서 2인, 3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인데, ‘통계’에 따르면 1가구의 평균 구성원 수는 3인이다. 3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계산하면 380만원이다. 가구 내 두 사람이 버는 상황이라면 임금수입이 400만원. 그 정도의 임금수입이어야만 생계유지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만 원 미만에서 타결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점차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민주노총 관계자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하여 시도하지는 않았다. 나의 소견은 미국에서의 경험에 근거한다. 2십년+ 전, 내가 미국에서 근무할 때 회사 내 비정규직 직원이 있었다. 소위 ‘Temporary’ 라고 불리우는 직원들인데 (우리 말로 하자면, ‘단기채용’ 보다는 ‘파견’ 이라는 용어에 해당된다.) 이들은 정규직의 각종 복리후생,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반면 시급이 엄청 높았다. 이들은 임신출산 등의 장기휴가 직원 등을 대신하여 함께 일했는데 각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그러한 근로의 형태를 택한 것은 거의 100%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정규직' 을 ‘원하지 않는’(원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유도 꽤 다양한 편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후 여행을 떠나기 위해 단기취업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 할 때, 다른 인생의 계획이 있는데 그전에 예측할 수 없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 신체검사를 거쳐 교육을 받고 팀웍을 이루고 대인관계, 조직의 다양한 구조와 층위, 소위 ‘정치’ 에 무관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가족’ 같은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정규직에 비해 조직사회의 책임감에서 면제되고 주어진 업무 외의 사항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 즉 이러한 영혼(근로자)들이 '자의에 의해' 이런 직무, 근무형태를 택하는 일종의 취업문화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정착한 비정규직 문화는 물론,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미국에서도 암암리에, 교묘한 수법으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착취가 발생하고 있겠지만 (정교한 제도, 법제에 의해 좀 더 견고히 견제되는 편이라 믿고) 이 나라에서는 더 극렬하고 비열한 인권유린의 치사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터이다. 어쨌든, 모든 문명사회의 문제들이 한국에서는 꼭 해당자들의 감정까지 건들이고야마는 고도의 ‘비인격적’ ‘비존중’의 문제로 비화되는 모습이라는 점.


조금 비약하자면, 이런 횡포들, 기득권층, 강자, 가진 자들의 횡포가 아직도 무소불위의 기세로 횡행하고 있고 이에 의한 ‘피해자’들이 분노와 부당함에 대한 대처가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 거기서 더 한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사회전반적으로 ‘인권’ 에 대한 감수성과 인식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화적 복합성의 특성상 우리가 말하는 소위 ‘선진국'(개인적으로, 경제학이나 국제경영학 같은 데서 이 단어가 쓰이는 것을 싫어한다.), ‘인권선진국’ 으로의 진입은 영원히 오지 않는 세월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다만 개별적, 집단적 차원에서 조금씩 수정과 개선의 가능성이 체감되는 사회적 분위기 내에서 각자가 이해할만한 범위를 정해 스스로의 ‘개념’을 정립하고, 감정적 대응이 아닌 이성적 대응의 도구와 자세를 갖출 수 있게 된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한국형 정신증인 ‘홧병’의 억울함, 발병률이 낮아지고 ‘행복’ 과 편안함이 조금은 더 가까이 만져지지 않을까 하는, 일개 시민으로서의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Future] 비트코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