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지 Feb 03. 2019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나를 먹어치우는 가족

원제: What's Eating  Gilbert Grape 

설 연휴에 "길버트 그레이프 (원제: What's Eating Gilbert Grape) 를 보고 떠오른 것들 중 첫 번째는: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란 단어였다. '벗어나고 싶은' 이란 말이 더 적확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행이다 싶게, 이 '웰 메이드 (well-made)' 영화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길버트 그레이프 (조니 뎁)은 아이오와 주 '엔도라' 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스물 넷 청년.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며, 아버지가 목을 매고 생을 마감한 데에 대한 충격으로 체중 300kg 에 육박하는 거대한 '고래'가 되어버린 엄마와 정신지체아인 동생 '아니'를 돌보며 산다. 그에겐 큰 누나 에이미와 사춘기에 접어 든 엘렌이란 이름의 여동생이 있는데 이들 또한 불평 없이 가족을 돌보고 자신의 삶이 '먹어 치워지는'것에 아무런 반항이나 저항심을 갖지 않는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순식간에 마을 첨탑 (가스탱크탑)을 오르고 있는 아니가 일으키는 크고 작은 소동을 소화하느라 그의 작은 삶은 매일 매일 소진되고 있다 할 수 있는데 그에게 주어진 작은 분출굴뚝, 일탈이 하나 있다면, 보험회사를 운영하는 켄 카버 씨의 바람둥이 부인과의 부적절한 관계. 그 또한 비밀스럽거나 애틋한 로맨스가 되지 못 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란 점이다. 그렇게 그의 삶은 가족과 마을 주민 모두의 일상 속에 소비되며 흘러 내려가고 있다.       


우린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형, 어디 가?
글쎄 여기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끝없이 넓잖아. 



아이오와 평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상상력마저 제한된 무구한 평면공간. 무구하게 넓지만 단조로움으로 묶여진 공간.


그의 무한 반복 순환적 일상에 균열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부모의 이혼 후 트레일러 자동차를 타고 이모와 함께 떠돌아다니는 끊어진 가족의 '소유'자 베키의 등장. 베키는 관찰을 하고, 관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마침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엔도라에 머무르게 된 베키는 가스탱크에 올라 가 있는 아니와 그를 설득하여 내려오게 하는 길버트를 목격하게 되고, 그 장면에 이끌리게 된다. 서로 다른 듯, 동질감을 느끼는 베키와 길버트가 서로에게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는 사이 시골 마을 '엔도라' 에는 대형 마트 '푸드랜드'가 들어서 길버트가 일하는 가게를 포함한 작은 상점들의 존립을 위협하게 되고 조립 완성된 형태의 상점으로 '배달'되는 '버거 반' 햄버거 식당의 등장이 예고되는데.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란 책이 연상되는 대목.)

벗어버릴 수 없는 일상에 묶인 길버트와 떠도는 삶을 사는 베키


베키를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기 시작하는 길버트.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원들은 온통, 엄마가 에어로빅 수업에 참여하여 살을 빼는 것, 아니에 대한 것, 에이미와 엘렌에 대한 것 등 다른 가족구성원에 대한 것 뿐이다. 길버트의 가족이 누리는 '안정된' 일상은 길버트의 '머무름', 봉사와 헌신을 담보로 한다. 요란하게 치하하진 않지만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깊이 깔려 있다. 반복되는 엄마의 메시지 "다시 사라지지 마라. 엄마를 떠나지 마. 넌 희미하게 빛나는 갑옷의 기사님이야. (찬란하게 빛나는 갑옷이 아니고요? -- Knight in Shining Armor) 아니, 희미하게 빛 나." 길버트를 '자발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주문과도 같은 말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다른 방법을 알지 못 한다. 황량한 아이오와에서 그 이상의 상상력이 어찌 발현될 수 있을까.


심지어 카버 부인이 길버트를 떠나며 하는 말조차 "세상에 많은 게 남자야. 하지만 내가 너를 선택한 건, 너는 내 곁에 있어줄 것 같아서였지. 날 떠나지 않을 거 같아서. " 라니. 


그런 길버트에게.


슬픈 기적과도 같은 일이 발생하고, 이창동 감독의 최근작 "버닝"과 대응되는 씬과 함께 길버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이 영화를 보고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각 났다. 떠나 온 자로서, 그 노하우를 (더) 모아 '떠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방법을 알켜주는 일.  


선함과 성실한 길버트를 잘 표현한 조니 뎁,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아니의 행동들을 소름 끼칠 정도의 사실성으로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아이오와라는지역 이미지와의 매칭, 단단히 꿰매진 가족의 참담하지만 담담한 삶과 그 안에서도 '존엄' 을 내치지 않는 사람들의 소박한 기품 --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매우 인상적인 영화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적 '가족정서'를 대비하거나, '그래서 가족이란..' 운운 하지 않았음 하는 것.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것과는 차원과 층위가 전혀 다르다.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어디든 떠날 수 있다고.


필요하다면, 같은 '장소'에서도 훌쩍 다른 곳(차원)으로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더 알고 싶고, 알려주고 싶다. 

당신에게 '베키'가 되어 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