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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Dec 06. 2023

[영화] 서울의 봄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의 시작

《서울의 봄》

영상 분류 중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있지만, 이 또한 전부의 사실, 사실의 전부라고 보기 힘들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까지 촬영, 편집 등의 과정 속에 끊임없는 재해석이 반영되는데, 관점(perspective)이란 것을 장착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상업영화라는 것은 '재미'와 흥행요소가 가미되어야하니 '공식'을 따라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적어도 손익분기점을 넘겨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는 역사를 어떻게 '각색'하고, 현시점에서 어떻게 재조명 시점해야 할 것인가. 사회정치적 함의들과 관객의 취향변화, 관람환경의 변화 속에서. 《서울의 봄》의 손익분기점은 관람객 400만이라고 한다.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1979년 10월26일 ~ 1980년 5월17일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1979년 10.26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는 1968년 체코슬라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에 비유한 것이다. (위키피디아)


1979년 10월26일. 
1979년 12월12일.

경상도 출신 육사 4년제 중심으로 조직된 사조직, 하나회. 

쿠데타로 만든 정권이 가장 두려워한 건 또 다른 쿠데타였다. 박정희의 비호 아래 하나회는 청와대, 국방부, 육군본부, 수도경비사령부, 공수특전단, 서울 근교 전방 사단 주요 요직에 회원을 거느리며 막강한 위용을 뽐내게 된다. 박정희가 정 유지를 위한 친위대로 삼았던 것.

그러나 하나회가 점점 그 위세를 더하게 되자 박정희는 육군대장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수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통해 사실상 수장격인 전두환을 견제하려하고, 이를 눈치 챈 전두환은 군사반란을 획책한다. 전두환은 군의 모든 통신망을 도청 및 감청할 수 있었던 보안사의 수장, 보안사령관이었다. 통신을 장악하고, 하나회라는 거대 충성 조직을 거느린 전두환.

"인간이라는 동물은 말이야. 자기가 리드하길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란다니까."

"저 안에 있는 놈들 말이지. 권력의 콩고물을 받아먹으려고 빌붙어 있는 거야. 잘 봐라. 내가 입 안 가득 쳐넣어 줄테니까."

개인적으로 전두환, 그와 그의 자녀가 관련된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 불매운동에 가담할 정도로 치를 떨며 싫어하지만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그의 심리는 두고두고 연구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권력에 빌붙는 군중의 속성을 탁월하게 읽어냈고 스스로 그 리더의 역할을 맡았다. 악마의 화신 같은 그를 죽기까지 보위하던 자들이 있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이란 이름은 두고두고 회자되어 역사와 세대의 심판, 판단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그린 전두광은 실제 그 인간이 아니라 제가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전두광들이에요. 권모술수에 능하고 눈치도 빠르고, 자기 사람들도 잘 끌어안고, 그러면서도 누구도 믿지 않는 그런 걸 형상화한 면이 있어요.” --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수 감독 


반전 없는 역사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에 영화를 보는내내 마음을 졸였다. 사건에 대해 거의 무지에 가까웠던 사람으로서 이왕이면 최소한의 무력대치를 간절히 바랐지만 실상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 보다 끔찍하고 비참했다.  정우성 배우가 맡은 이태신 (실존인물 : 장태완) 수경사령관이라는 '영웅'과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 (이상 실존명. 순국영웅.) 등 이 아니었다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기혐오가 일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들의 말로는 비극적이었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소장의 경우 사태 직후 고문실로 끌려갔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강제 예편되었다. 이후 6개월 간의 가택연금 생활 후 1982년 한국증권전산회장을 지냈고 1994년 재향군인회장, 2000년에는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12.12 사태의 '역적'으로 몰려 체포되는 모습이 TV 를 통해 방송되자 부친이 곡기를 끊으시고 이듬해 돌아가셨고, 서울대 자연대를 수석입학한 그의 아들은 실종된 지 한 달만에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아내 이병호는 그가 사망한 2년 후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따님만이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김오랑 중령 (당시 35세)의 아내 백영옥은 남편을 잃은 충격에 시력을 잃어 실족사했고, 당시 23세였던 정선엽 병장은 처음엔 '신군부'로부터 '역적'으로 분류되어 국립묘지 안장이 거부되다가  1980년 3월26일 안장되었다. 

《서울의 봄》 은 12.12 사태를 그린 최초의 영화물이라고 한다. 상상기반이 아닌 사실기반 영화이니 결과는 누구나 알고 있는 그 것이지만 내내 마음이 졸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다음 번에는 좀 더 상상력을 가미하면 좋겠다라는 염원이 들었다. 이렇듯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의 소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파국'의 결말을 뒤집어보는 시도는 어떨까. 결국 다큐멘터리든 영화든 영상예술의 백미는 현실대치, 환상충족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 관람 내내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같은 결말을 꿈꿔보았다. 

《서울의 봄》은 손익분기점을 훨씬 넘길 듯하다.

p.s. 세상에 그득그득한 '전두광인'들을 떠올리니 이 영화의 최종 감상맛은 '열받음'이지만 그래도 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파가 몇 일 갈 거 같다.


영화 서울의 봄 마지막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AZ7cnwn2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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