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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Dec 13. 2023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모두가 자신의 채널을 갖는 시대를 예견한 시대를 뛰어넘은 예술가 


백남준 (1933-2006).


내가 정의하는 백남준은, '변방에서 온, 인류의 미래를 본 예술가'이다.  

인터넷 시대를 예견했으며 현재의 1인 미디어 즉 유튜브의 시대를 정확히 예측했던 사람.

초기 인터넷이 '고속도로' 같은 망 '연결'에 초점을 두고 있었을 때 

그는 이미 넘쳐나는 정보, 시각 이미지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표현대로 '한국에서 가장 부패한' 그러나 유복한 집안에서 '엘리트' 음악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한국 전쟁 전 일본에서 '신문물'을 만나 이후 유럽에서, 

그리고 뉴욕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활동했고 미국에서 죽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30여년만에 귀국하여 부모의 묘를 찾았다. 


그 자신이 어디에 묻히길 원하냐, 부모 묘소 옆은 어떠냐고 물으니, 

"화장해서 세상 곳곳에 재를 뿌려달라. 한국에도 뿌리면 되겠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화장을 하고 장례를 치르면 좋겠냐고 물으니 

'장례나 화장비용이 가장 저렴한 곳' 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고나서는 "아마 미국이 가장 저렴하지 않을까" 라고.


사실상 가족, 민족이라는 결속은 그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 했다. 그에 예속된 삶을 살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인식은 이국 땅에서 비로소 그의 안으로 들어왔을 듯. 

한국인, 이라는 인식보다 기득권자과 비기득권자의 구분으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백인우월주의, 유럽숭배주의 등의 문화적 텃세 속에서 그는 

'기성세대', 기존질서의 파괴를 누구보다도 염원하고 도모했던 사람이었을 테다.


영화 속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처음 백남준을 알게 되었을때 접한 단어가 

"Yellow Peril" 이다. 


황색 재앙이라니. 


스스로를 노란 얼굴의 동양인으로 비하하는 동시에 '재앙'으로, 

체계의 파괴자라고 지칭한 것에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미국 이민생활을 하면서 나는 왜 그런 태도를 취하지 못 했을까. 

(천재와 범인의 차이겠지만 말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이고.) 

백남준의 실존인식은 아방가르드라는 장르를 구현하는 예술가가 소지할 수 있는 

최적의 자격이자 자부심이며 동시에 대단한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이같은 선언은 허세가 아니었음을, 그를 알아갈 수록 발견하게 된다. 

그는 '기술'의 시대가 올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리고 기술이 허물어뜨릴 경계와 한계를 보았을 것이다. 

이제 그의 이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기술을 조롱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공평과 평등한 삶을 영위하는데 이바지했다.

더욱 많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여한 과학과 기술이

이제는 탈인간화를 통해 신인류로 등극하려는 듯한 시점에 

백남준이라면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조롱하고 허물고자 했을까. 


백남준에게 브라운관은 상업화된 문화의 상징이며 비인간화된 기술을 풍자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였다. 다만 예술가로서 과학과 기술을 섭렵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젊은 그는 물리학과 전자공학에 그의 재능을 기꺼이 할애하기로 결심하고 비디오 전문가 슈야 아베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나 기술자와 협업하며 자신의 예술적 지평을 확장했다. 그는 브라운관 기술에도 능숙해져 자석을 사용하여 화면의 구성을 오실로스코프 파동과 유사한 특이한 기하학 모양으로 바꾸기도 할 정도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협업을 완성한 진정한 모험가였다. (아래 링크 기사에서)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69518.html


세계일류가 되면 나라고 뭐고 없다.
민주주의가 뭐냐고? 말대꾸하는 것이다!
내가 문화 징기스칸이 되어 전 세계 미술판을 쓸어버리겠다.
예술이 뭐냐고?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 속고 속이는 (고등)사기. 
서구와의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https://seulsong.tistory.com/1239


백남준은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친일파인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고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1952년 도쿄 대학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퀼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단순한 머리"를 위한 선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미국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레이다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2년여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실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적인 TV를 통해 훗날 비디오 아트라고 불리게 되는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는 백남준이 자신의 즉흥음악 또는 무음악의 발상에 기초한 실제 퍼포먼스, 그 흔적과 결과물처럼 유럽에서 자신이 진행해온 작업의 성과와 함께 TV를 비롯한 미디어로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시도하는 작업이 공존하고 있었다. ‘적분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레코드 샤슐릭’같은 20세기 전위음악에 젖줄을 대고 있는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걸음을 위한 선' '바람을 위한 선' 같은 우상파괴적 설치 작업 및 참여예술 형태의 퍼포먼스가 함께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전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정리하는 종합적인 큐레이팅 전시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전시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면서 아카이빙 작업과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한동안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1963년 첫번째 전시를 비디오아트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만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이 일어난다.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1974부터 백남준은 영상으로서의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미술적 방법인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그에 따라 ‘TV 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생명의 상징을 전자적으로 결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합성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특히 'TV 붓다'는 그의 초기 비디오 설치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문화적 환경이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호의적으로 변화하면서 폭발적인 수준의 미디어 전시가 빈발했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그룹전 형태로 수많은 전시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74년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과 함께 비데아 앤 비디올로지 : 1959-1972이라는 예술과 기술을 교차시키는 하이브리드에 관한 저작을 내놓아 미디아 아트의 이해를 도왔으며,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네트워크 방송을 끌어들여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을 꾀한 놀라운 시도였다. 나아가 1984년 1월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까지 연결된 이 국제적인 규모의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오잉고 보잉고,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의 예술가과 대중문화의 스타가 다수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하였다. 이로써 전세계적인 차원의 대중적 각인이 이루어졌고, 마치 대중스타처럼 성가를 높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져 위성 연결을 통한 전세계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새로운 부족사회를 낳는지 실감시켰다.


1984년 일본 도쿄 소게쓰[草月]홀에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퍼포먼스 '코요테 콘서트 II'가 펼쳐졌으며, 이들이 각각 몽골의 늑대 울음소리와 초원의 달빛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1961년 첫 만남부터 계속 이어온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후 퍼포먼스 계획은 요셉 보이스의 죽음과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1992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는 독일 쿤스트 할레와 스위스 쮜리히에서 진행된 전시의 서울 투어전시로서 당시 과천 막계동에 자리잡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총 관람 인원 20만명이 찾은 첫번째 전시로 기록되었다. 이 전시의 주요한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이다. 1993년 백남준은 독일 작가 한스 하케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국가전시관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문명의 동서남북'이라는 주제의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는 국내외 총 관람객이 160만 명에 달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백남준이 직접 관여한 ‘INFO Art’전이 주목받았다. 또한 백남준은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시관 부문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진출하는 교두보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같은 해 그의 예술적 정수가 담긴 엘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 전시를 진행했다. 1999년 4월 9일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6개월만인 그해 10월에 재기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2006년 1월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 유해가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이상 위키백과 발췌)


예술은 밋밋한 이 세계에 양념과 같은 것입니다.
이 상투적인 세계에 그나마 예술적 충격이 없으면
인간들은 정말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
예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건조한 세상이 재미없다 보니
예술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위대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전위 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우리민족은 오랫동안 유목민이었으며, 유목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주어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즉 무게가 없는 예술만이 전승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fnxpPHE3UQ

https://www.youtube.com/watch?v=SEEuoAtsMrE


Amanda Kim, director of '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explores the life and work of visionary Korean artist Nam June Paik, the 'father of video art'. This film dives into his global experiences, his Asian identity, and how these factors influenced his art. Kim shares her five-year journey of piecing together Paik's life, drawing from his network of friends worldwide and his extensive archives. The director discusses Paik's personal history and the global events that served as his "antagonist" and shaped his groundbreaking work. She brings out his eccentric persona, his embrace of 'happy accidents' in the creative process, and his conviction in art as a universal communicator. Despite his work being ahead of its time and initially dismissed, Kim emphasizes Paik's significant impact on pop culture. The director doesn't shy away from showcasing Paik's contradictions and his constant push-pull with the art world. The film showcases his persistent optimism in challenging the norms, leaving the audience inspired and nudging them to question the status quo. Kim reflects on the making of this film as her debut, touching on the challenges she faced, the impact of being a female filmmaker, and the lasting influence of Paik's approach on her own journey. 


https://www.youtube.com/watch?v=VULHOyF0sq0https://www.youtube.com/watch?v=w0E2v_rbY7s

https://www.youtube.com/watch?v=w0E2v_rbY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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