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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씨일기 Jan 20. 2024

권선징악을 기대하는 마음

매일 쓰는 짧은 글: 240120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를 버린다. 나의 안락함과 평온함을 가장 먼저 버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마주하기 위해 가장 먼저 스스로를 갈아 넣어버린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오히려 이런 점들이 장점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에 만나는 어려움이란 결국 시험이 가장 우선이었고, 시험에 있어서 나를 버리고 내 시간을 모두 공부에 쏟는 태도는 대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계속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나 스스로를 박살 내면서. 





대학교를 2군데 다니고, 남들보다 긴 시간 공부를 이어오며 살아왔다. 2번째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바로 취업을 하는 대신 나는 사회가 아닌 공부의 연장선상과 같은 수련 기간을 거치며 또다시 나를 어떤 틀 안에 가둬놓았다. 직장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엄밀히는 온전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책임질 일은 없이 남들이 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안락한 감옥에서 졸업 후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이 익숙하고 쾌적한 감옥이 더 편안한 사람이 되었다. 박살 내지기 싫어 이 안에 웅크리고 앉아 내 삶의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면서도 바쁘게 다른 사람들을 기웃기리며 남들의 흠을 찾아내 내가 더 낫다는 자위만을 늘어놓으며 안락한 불행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틀의 기간도 끝나가고 4년의 시간이 끝나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내던져져야 하는 시간이다. 



이미 오랜 시간 스스로를 가두고 의미 없는 일들에 자신을 갉아먹으며 웅크리고 피하고 있었던 동안에 나는 공부 말고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진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은 두렵고, 이제는 그 도전에 앞서 또다시 스스로를 내던져버릴 나 자신을 잘 알아 그런 행동을 취하기도 무서워졌다. 새로움이란 언제나 고통이 수반되었고, 이제는 나 스스로를 박살 내는 고통을 이겨낼 체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적당히가 안 되는 이 몹쓸 놈의 성격 때문에 변화는 더더욱 멀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발만 동동, 손만 물어뜯으며 어쩔 줄 몰라하게 되어버렸다. 



항상 잘해와야 했고, 나름 부족함 없이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해나가야만 했다. 항상 백 점짜리의 선택과 과정과 결과를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고 그런 나는 점점 선택을 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차라리 선택을 하기 전에는 내가 백점의 결과에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닌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지만 선택을 하는 순간, 내 손을 떠나버린다는 것이 너무도 두렵게 느껴졌다. 마치 완벽하게 갖춰진 틀 안에서 완벽한 그림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작가가 된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아내기란 너무나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당연하게 내가 가져야할 것들은 제일 좋은 것들로 이뤄져야한다는 비뚫어진 믿음은 더욱 공고해져만 갔다. 그러다 도피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는 것. 내가 힘들고 불안하고 불행하니, 다른 사람들을 자꾸만 찾아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고개를 들게 된다. 남들이 나보다 더 행복할까 봐 불안함을 양손 가득 그러쥐고서는 그 사람들의 현재는 어떤가 끊임없이 알아보게 된다. 



얘는 공부도 못했는데, 얘는 진짜 별로인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다들 잘 나가지. 시커멓고 당연한 선민의식과 같은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공부를 잘했고 누구보다도 노력을 많이 했다고 스스로에게 과대평가를 주면서 나보다 가진 것이 많아 보이는 타인에게 숨이 막힐 듯한 질투를 느끼게 된다. 결국 사진 몇 장으로는 그 사람들의 인생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들 그럴 듯 해 보이는 외관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말들과 그럴듯해 보이는 장소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네가 멍청하게 시간을 버리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왔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공평하다. 



저 사람들은 나보다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당연히 모든 면에서 내가 더 나아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이들의 노력보다도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에만 몰두를 해 스스로를 불쌍한 피해자로 만들어버린다. 나를 괴롭게 하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는 성실한 거북이가 나태한 토끼를 이기고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의 권선징악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회에 나오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보다 재치 있고 머리 회전이 빠른 친구들이 더 성공한다고 말을 한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상을 받고 나태한 사람은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라는 당연한 진리가 어느 순간 반드시 이뤄진다는 확고한 믿음이 반전된다. 사회에 나오게 되는 순간부터 이뤄지는 차가운 현실이 나이를 한 껏 먹어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내 피부에 무심히 다가왔다. 나이가 개인의 성숙함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지만 어찌도 이리 아직도 어리고 어린 학생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건지. 익숙한 자기혐오가 오랜 친구처럼 곁을 지킨다. 스스로도 어딘가 속에서는 그들도 여러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저 내 고통과 노력의 값을 쳐주고서는 그들의 현재를 부당하다 여긴다. 그치만, 그치만, 이라고 끝없이 되뇌이며. 






반드시 한 번은 겪어야만 하는 신변의 변화, 취업 시장에서의 동태 파악과 이직, 취업 준비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구덩이 속으로 빠뜨려버릴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 남은 시험도 준비해야하는데 손에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남들 다 겪는 일에 나만은 이렇게 유난인지도 이제는 자기 혐오를 넘어 비웃음이 날지경이다. 


어느덧 30이 훌쩍 넘는 시간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사는 것은 너무 힘들고, 외롭고, 가차 없고, 슬프고, 괴로운, 정답을 찾기 못해 이러저리 떠밀리며 떠돌게 되는 일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이걸 몇 번을 더 반복해야 할 까, 어떨 때는 그게 못내 못견디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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