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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씨일기 Feb 02. 2024

반 백수의 동네 공원 관찰일기

매일 쓰는 짧은 글: 2402202




작년 날이 한참 더워질 무렵부터 눈이 내리는 계절이 될 때까지, 다니던 직장 정책의 변화로 나는 재택과 비자발적 프리랜서의 형태로 근무를 해야 했다. 매일 출퇴근의 전철에 몸을 싣고 일을 하는 대신, 매일 집 앞 공원으로 운동(이라고 하고 산책 정도의 가벼운)을 다니기 시작했다.



주로 내 출몰 시간은 오전 11~12시 사이. 작은 공원이라 10바퀴를 돌고 집에 가면 딱 1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대에 공원에 가면 확실히 어르신들이 가장 많다. 젊은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고 에어팟을 끼고 슬렁슬렁 걷다 보면 어르신들이 저 젊은 처자는 뭐 하는 사람인가, 하고 쓱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이 때는 최대한 무해한 사람임을 어필하기 위해 사람 좋은 미소로 적당히 지나쳐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라도 주중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매일 공원에 나와 빙빙 걷기만 하는 젊은 사람이 있으면 좀 이상해보일 것 같으니.. 어르신들은 각자의 인생 경험을 녹여 운동을 하신다. 나무에 등을 팍팍 부딪히거나, 팔을 맘껏 휘두르고 다니시거나. 서로의 운동법을 전수하거나 하기도 한다. 나이배가 비슷하다는 이유여서인지 모르는 사이여도 쉽게 쉽게 대화를 시작하는 모습이 쿨하다. 하지만 결국 운동의 마무리는 걷기로, 다 같이 사이좋게 일렬로 서서 공원을 빙빙 돌게 된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오면 보이는 건 유치원 친구들의 단체 나들이.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선생님 2분이 얼핏 봐도 6-7명은 되어 보이는 어린 친구들을 데리고 공원에 놀러 나온다. 긴 줄 하나에 양 양옆으로 버스 손잡이 같은 게 달려있어 모두 얌전히 그 손잡이를 잡고 종종걸음으로 공원에서 걸어 다닌다. 노란 옷, 빨간 옷, 초록 옷. 다양한 총천연색의 옷을 입고 이건 뭐예요, 하고 물으며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보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날이 선선한 가을의 계절에는 일부로 아이들이 있을 것 같은 시간대에 산책을 나서기도 했다. 떨어진 꽃잎 하나에도 까르르 웃으며 선생님이 쥐어주는 과자를 열심히 오물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 나중에 커서도 지금의 즐거움이 기억 어디에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흐뭇한 시선으로 어린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고생하시는 선생님들을 보며 또 응원의 눈길을 보내며 총총 지나간다.



점심을 먹고 2-3시쯤에 가면 이번에는 동네 어르신분들이 산책이 아닌 수다를 목적으로 공원 한편에 앉아 계신다. 한 시간을 운동하는 동안 지나가면서 봐도 단 한 번의 자리이동 없이 그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신다. 어디의 며느리는 어떻며, 누가 어디가 아파서 어디 병원을 갔는데 별로였다며, 돈 백만 원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며. 공원을 돌면서 걷기 운동을 하다가 어르신들이 모여계신 곳을 지나가야 할 때면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시나, 귀를 쫑긋하게 된다. 좀 더 능청스러웠으면 슬쩍 근처 벤치에 앉아 귀동냥을 해도 재밌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눅진한 인생스토리가 바로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아마 내가 스쳐 지나가고 나면 나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겠지. 조금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기분도 든다.



오후 5시쯤 전후로 해서 날이 슬면서 어두워지려고 할 때 공원에 가면 이번에는 초등학생 이상의 학생들이 많아진다. 삼삼오오 모여서 그네 zone에서 서로 밀어주면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듣기 즐겁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지만 약간 근처 백수 선생님들의 활동 시간인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때의 산책은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꼬까옷을 입은 강아지 친구들을 맘껏 볼 수 있고,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시간이라 걷다 보면 어느새 일몰같이 붉어진 하늘도 덤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밤 시간대, 이때는 확실히 퇴근 후 직장인들이 공원을 점령한다. 귀에 런총각을 들으며 뛰는 듯한 젊은 사람들, 밤마실을 나온 강아지 친구들, 그리고 공원 중앙에 있는 농구장과 테니스장을 이용하는 중고등학생 친구들. 하루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이용하는 시간대라 조금 어둡지만 활발한 생기를 느낄 수 있어 이때의 공원도 즐겁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건강을 위해 공원으로 모이는 사람들, 뭔가 그 성실함에 나도 내일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힘을 얻게 된다.







같은 공원이지만 시간대에 따라 만나는 사람도 달라지고 느껴지는 분위기와 감상도 달라진다. 그래서 때로는 내 산책 메이트들로 누구를 고를까, 하는 마음으로 공원 출근 시간을 정하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암묵적으로 인지하는 것처럼 나의 존재도 어느새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으리.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바라며 또 잠자리에 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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