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살아있는 동안, 조금은 더 고매한 목표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을 떠나
태어남에 스스로 정한 가치관을 따라, 좀 더 숭고한 이념을 지니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타인을 해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타인에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범주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인간도 그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으니.
나라는 존재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짓밟아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을 늘 품어왔던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첫걸음이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지 않도록 노력하자, 로 이어졌지만
사실 이념과 현실의 괴리는 언제나 그렇듯 너무나 명확히 갈라져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많이 보는 내가 그렇게 ‘유난’을 떠는 것이 스스로도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돌이켜보았다. 먹는 것.
‘나’는 어제까지의 내가 먹어온 결과물. 이것 만큼 나를 대변하는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스스로 몇 가지 규칙을 세워 음식을 조절해 보자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더란다.
동물성 섭취는 안돼. 왜냐면 동물도 모두 생명이니까.
이런 단순하고 유치한 명제를 마음에 품고 다른 사람에게 선언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노력으로 일단 시작을 하고 한 걸음씩 떼고 있었을 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식물 또한 생명인 것을 식물과 동물에도 그 경중을 나누고 있었나.
그렇다면 나는 완전한 생존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먹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만 많고 완벽히 준비되어야 한 움직이는 비루한 몸뚱어리를 가진 나는 다시 고뇌에 빠졌다. 어디까지가 생명의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종족 번식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여러 과정들을 거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쓴다. 그럼 이 과일은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직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익어 떨어지면 생명이 없는 것일까.
아님 그 속에 있는 씨앗만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뿌리만이 생명이고 그 외에 것은 부수적인 걸까. 끝이 없는 생각 속에 잠겨 다시 침잠만 일삼았다.
이 고뇌는 사람이라는 주제에도 돌아왔다. 그럼 머리카락은 내 머리에 붙어있을 때는 생명이 있고 떨어지는 순간 생명이 소멸되는 건가. 나는 하루에도 몇 가닥의, 수 십 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애초에 생명이 있는 것이 다른 생명을 얻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일까. 중요한 듯 중요하지 않은, 답이 없는 질문들만 머릿속을 헤매고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다시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내일 아침에 먹으려 불려둔 병아리콩을 조용히 삶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