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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대한 단상

주량이 줄어 슬픈 주정뱅이의 한탄

by 왕씨일기


정확히 언제라고 기억을 하지는 못하지만 술이라는 건 항상 가까이 곁에 둔 친구 같은 존재였다. 들이부어라 마셔라의 타입은 아니고 약간은 골방 할아버지 취향의 반주 스타일을 좋아해서 저녁에 맥주 한 캔, 막걸리 한 잔 이런 식으로 잔잔바리 술잔을 비워왔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교의 마지막 즈음에 마음이 맞는 술친구들이 생겨버렸고, 술 자체에 대한 즐거움보다도 다 같이 모여 마시는 떠들썩함의 신남을 알아버려서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술쟁이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아아, 정말 많이도 마셨던 것 같다. 심지어는 차가 있어 멀리 옆 동네까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이 의리의 술친구들은 없는 돈을 털어 그 친구의 대리비까지 모두 엮어 술자리 정산을 했을 정도였다.


시험이 끝나고 다른 건전한(?) 친구들은 피시방이나 보드게임방, 아니면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던 와중에 우리의 이 술친구들은 중식당의 방을 잡아 돌아가는 원형 테이블 한가득 요리를 시켜두고 돌려가면서 각자의 입안으로 고량주를 탈탈 털어먹었다. 평소에 기본 인성도 애늙은이의 평을 받는데, 술의 취향도 그쪽을 벗어나지는 못하나 보다. 그리고 그렇게 중국집을 한 차례 털고 나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던 메기매운탕을 파는 집의 가장 안쪽 마룻바닥 방으로 기어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핑계를 벗 삼아 밑반찬인 김치와 물을 넣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매운탕을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먹었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무서우리만큼 즐겁고 철이 없으며 건강한 위를 가졌던 시기였다.




한동안 망나니처럼 술을 먹고 다니던 나는, 이제는 오래, 또 길게 음주 생활을 즐기기 위해 오히려 혼술이나 집에서 반주로 먹는 술은 딱 끊고 약속이 생겨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만 술을 먹기로 다짐했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직장에서 새로 만나게 된 남자친구가 꽤나 애주가여서 나의 음주 생활 2막이 떠올랐다.


나는 그 긴 음주 라이프를 즐기면서도, 맛있게 소맥을 마는 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그룹의 술자리를 가도 그 자리에는 아주 뛰어난 브류어 친구, 즉 소맥을 기갈나게 말아주는 소맥 마스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들은 정말 다정하게도 본인들의 술말기 스킬의 감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술자리의 시종을 전부 맡아 모든 친구들의 잔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나는 마치 입을 벌리면 모이를 가져다주길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그저 따라주는 완벽한 비율의 소맥을 꿀떡꿀떡 먹기만 하면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나의 지금 남자친구도 내 입맛의 딱 맞는 비율을 탈 줄 아는 소맥마스터여서 나는 인생의 운을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각자의 바쁜 삶 때문에 술을 먹는다고 해도 남자친구 이외의 사람과 마실 일이 현저하게 줄어버렸다. 그래도 나의 '혼술, 반주' 금주의 대원칙은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만나게 된 친구와 둘이 술을 진하게 먹게 되었는데, 억지로 먹인 사람도 없었고 안주도 넉넉히 잘 먹어뒀는데도 그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의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누가 나의 주량을 물어볼 때마다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을 한 세트로 잡았을 때 나는 2세트까지가 기분 좋게 먹는 수준이다,라고 한껏 말하고 다녔는데 어느샌가 주량이 줄었던 건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술을 먹고 그냥 멋 모르는 신입생처럼 제대로 맛이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의 정신은 나의 젊었던 한창때를 기억해 들이부었는데 나의 몸이 어느새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역류를 시켰던 것인지, 아무튼 나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술에 취해 남자친구에게 데리러 와달라, 는 평생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추태를 부리고 정신이 깬 다음 날, 술을 얼마 먹지 않았다는 나의 핑계를 열심히 들어주던 남자친구는 말했다. 사실 내가 너에게 소맥을 따라줄 때마다 소주를 엄청 조금 넣어주고 있었다고. 몰랐지? 너는 사실 술이 약하단다!라고 말하는데 머리가 뎅하니 울리는 느낌. 앗, 알게 모르게 나, 주량을 조절당하고 있었나! 나는 사실 주당이라고 착각했던 술찌였던 것인가!


남몰래 알 수 없는 분노도 오르고 자존심에 스크래치도 생겼지만 그 이후로도 남자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따라주는 술을 먹는 술자리에서는 얼마 먹지 않아도 번번이 취하고 마는 나 자신을 만났을 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술의 최대 전성기 시절은 이미 끝났노라고..


아직도 나를 술 잘 먹는 땡땡씨라고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이제는 몸을 사리는 나를 만날 때 웃기는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그들 사이에서 그네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아직 내가 술에서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멀쩡하다가도 화장실로 도망가버리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고개를 젓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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