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만난 '그'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솟구치는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에 있는 무제한 회전초밥집에서 기갈난 식사 시간을 가지기로 한 날. 1시간 동안 접시의 색깔과는 상관없이 무제한으로 초밥을 먹을 수 있다는 가게 규칙에 따라, 가게에 입장하는 손님들은 모두 자못 비장한 모습으로 입장해 자리에 앉았다.
브레이크 타임도 없는 바쁜 주말의 피크 시간. 엉덩이를 의자에 대자마자 1시간 카운팅이 시작되어 모두 앉자마자 눈은 레일 위의 초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서버의 '맛있게 드세요'라는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일로 거친 손을 내 뻗는다. 고상한 척 말하는 나도 똑같았지만.
정신없이 눈에 집히는 대로 초밥을 먹고 나니 금방 배가 차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문득 레일을 살펴보니 그 많았던 초밥들은 어느새 텅텅 비어버리고 초밥을 만드는 셰프님의 속도는 입 속으로 초밥을 넣는 레이스를 멈추지 않는 손님들의 기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히 수요와 공급의 끊임없는 굴레, 식욕이라는 밑 빠진 욕망의 항아리를 채우는 소리 없는 전쟁과도 같았다.
그 전쟁의 서두에는 제일 고참으로 보이는 '아저씨' 셰프님이 보이셨는데, 쉬지 않고, 정말 한숨도 쉬지 않고 기계처럼 초밥을 빚으셨다. 고개도 들 여유 없이 그저 빈 레일을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셨다. 거의 수도하는 승려의 모습처럼, 순례길을 떠나는 순교자처럼, 그렇게 묵묵히 초밥만을 바라보며 레일을 관장하고 계셨다. 그 숭고함에, 그 빛나는 전완근에 식사를 하다가도 뭔가 웅장한 기세 같은 것을 느껴버렸다. 세상은 이렇게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구나, 하는 반쯤 정신 빠진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1시간의 초밥 레이스를 뒤로 하고, 정말 누가 툭 치면 바로 입에서 초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배를 안고서 근처 여의도 공원으로 향했다. 걸어서 소화시키려는 계획이 무색하게도 걷는 것조차 버거워 남자친구에게 제발 잠시만 어디에 앉아 숨을 고르자고 말했다. 그러다 여의도 공원의 정자를 발견, 마침 주변에 빈 벤치가 없다는 핑계로 그 정자의 끄트머리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 정자의 구석 코너에는 미리 자리를 잡고 계신 아저씨 한 분이 계셨는데,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서류가방에 정장 차림으로 마치 외근이라도 나온 모습으로 보이셨다. 잠시 앉아서 쉬는 것인지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 혼자 그렇게 앉아 게셨다. 약간 막걸리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 건 내 착각이었을까나.
보통이었으면 누군가 먼저 선점하고 있는 정자에는 다가가지 않지만 지금은 나름 응급상황이라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렇게 겸석 아닌 겸석을 했는데, 평소에 약간 어딘지 모르게 뻔뻔스러운 다소 깜찍한 면을 지닌 남자친구가 평상은 눕는 것이라며 갑자기 벌러덩 누웠더란다. 당황스러웠지만 내 지금 이 거친 위장의 가득참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눕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고, 쓰고 있던 마스크를 마치 어몽어스처럼 얼굴로 한 껏 끌어올린 다음에야 나도 그의 옆에 바르게 자세를 취하고 누웠다.
거기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가 눕는 것에서 용기를 얻으셨는지 겸석을 했던 그 아저씨도 갑자기 벌러덩 누우시더니, 마치 갓 태어난 신상아 아기처럼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며 다리를 정자 기둥에 올리고, 기세 좋게 코를 골며 주무시는 게 아닌가. 거의 우리가 누워있는 곳 바로 옆까지 와서 누우셔서 남들이 봤으면 일행이라고 착각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라디오는 깜빡하셨는지 고대로 큰 소리로 그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뭔가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정말 어린아이가 벌러덩, 하고 누운 것과 같은 자세로 잠을 주무시는 아저씨를 보고 약간 뭐 하시는 분인가 우리끼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참이었다. 얼마 잠들지 못해 전화가 와 잠에서 깬 아저씨는 '아버지'라고 하는 분과 갑자기 굉장한 비즈니스적 이야기를 하셨다. 그 대화에 등장하는 돈의 액수가 조 단위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지만 1조, 1조라고 반복되는 이야기는 똑똑히 들렸다.
그렇게 쿨하게 몇 분 통화하시더니 일어나셔서 어딘가로 척척 가셨는데, 그 당찬 뒷모습에서는 벌러덩 눕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의도의 증권가 거리에 접해 있는 공원이니 뭔가 굉장한 투자자이신건가, 하며 둘이 쑥떡거리면서 낄낄거렸다.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겠지.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품은 타인들이 주변에 가득한 것을 새삼 느낄 때마다 세상이 재밌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니 새삼 오늘 다양한 '아저씨'들을 많이 만나 기억에 남아 글로 조금이라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