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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손

by 왕씨일기


요즘같이 베풂과 선함을 행하기 어려운 시대가 또 있을까. 오지랖이라는 이유로, 또 세상이 무섭다는 이유로 타인의 불편함과 도움 어린 시선을 몇 번이고 외면하거나 삼켜냈는지. 내가 도와줘도 괜찮은 상황일까,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와중에 나의 발걸음은 무심히도 앞으로만 나아가게 된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3-4 걸음이면 오를 수 있는 조그맣고 가벼운 언덕. 그 위에서 천천히 보행기를 끌고 내려오시려는 할머니 한 분. 조심스럽게 보행기를 언덕 아래로 먼저 보내놓고, 언덕 옆에 잡을 만한 것들을 한 손으로 휘져으며 조심히 발걸음을 내려보고 계셨다.


또 시작되는 고민. 내가 먼저 잡아드려도 괜찮냐고 여쭈어도 되는 건지. 도움을 주는 게 괜찮은지 아니면 불편하실지. 시끄럽게 시작되는 내적 갈등에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한 발자국씩 생존의 사투를 하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니 고민보다 말이 먼저 나가버렸다.


"조금 잡아드려도 괜찮을까요?"


팔을 가볍게 내어드릴 생각이었지만 웃으시며 덥석 잡으시는 손. 그 따뜻함에 손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울컥 뭔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도움이 되었구나, 도움을 주어도 괜찮았구나.


그 짧은 동행을 마치고 조심히 들어가시라 인사를 드리고 나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 속에서 문득 생각을 해본다. '할머니', 나이 든 여성의 손을 잡아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모두 보낸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아볼 기회도 없었구나. 뭔가 타인에게 도움을 주어 기쁜 마음과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한 먹먹함이 새삼 느껴져 평소보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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