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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와 맞바꾼 짜장면

by 왕씨일기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경험했던 사회생활 속에서, 거의 우리 아버지 뻘의 교수님과 같이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같이 근무하는 기간 동안 나름 예쁨을 받았었는데 사주를 보는 게 취미셨던 그 교수님은 나름의 애정표현으로 나의 사주도 봐주신 적이 있다.


직장 내 복도에서 교수님이 잠깐 서서 봐주신 사주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너는 부모님을 빛내주는 사주로구나."


그게 그때는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크게 피부로 와닿지가 않았는데, 요즘에야 가끔씩 귓가에 내리는 신의 전언처럼 그 말이 생각날 때가 있다.


좋게 말하면 효녀, 조금 돌려서 말하면 나보다는 부모님이 우선인 자식. 그게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큰 줄기가 아닌가 싶다. 손위 형제인 오빠와 나름 차별 아닌 차별을 받으며 크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성별의 차이로 비롯된 것으로 스스로 인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를 먹고 어느 순간부터는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일까? 나는 언제부터 나 자신보다 부모님의 안위나 행복, 불행에 더 민감한 아이가 되어버렸을까.




나는 생각이 많아 이런 성격에서 얻어지는 수많은 결함 가운데서 가끔 드물게 나타나는 묘한 몇 개의 장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 자신에 대해서 매우 객관적이라는 것. 이 객관성은 나의 성격, 인격, 능력 등도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고 뜯어보지만, 그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 꽤나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 이런 꼬인 성격의 수혜로 무엇을 해야 내가 행복한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종이와 문구, 다이어리와 같이 작고 하찮으며 사랑스러운 종이 문구 용품들이다. 매년 얼마 쓰지도 못할 다이어리를 연말 시즌에 한 달을 살까 말까 고민해서 몇 년에 한 번꼴로 구매를 하다가 휙 던져버리고, 길을 걷다 마음에 드는 노트나 문구 용품이 생기면 그 자리에 서서 그 물건을 사용하기 위한 당위성을 스스로 내리기 위해 갖은 분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거의 항상 그런 물건들을 사지 않고 조용히 내려놓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에 조금은 거부감과 부담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여느 때와 같은 연말의 어느 날, 또다시 다이어리 시즌이 찾아와서 심장이 마음대로 두근대 올해는 꼭 다이어릴 사서 일 년을 야무지게 채워보자라고 스스로를 또다시 속이고 있던 중이었다. 사람들의 문구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추천템들을 돌고 돌다 보니, 나름 이쪽 업계의 명품 다이어리, 노트들에 시선이 가게 되었고 근무 중 점심시간에 점심도 먹지 않고 근처 교보문고로 뛰어들어가 살까 말까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깟 32,000원. 카페 몇 번 안 가거나 막말로 술 한 번 안 먹으면 살 수 있는 돈인데 그 정도도 나를 위해 소비하지 못하다니 약간은 서글퍼진 마음도 안고 오후 근무를 하던 차였다.


그날 퇴근 후 부모님의 일정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나는 집으로 오늘 저녁 일정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엄마 아빠가 또 조금 다투셨고 엄마는 홧김에 점심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근데 그 와중에 오빠도 약속이 있어 집을 나간 상태. 이대로 두면 또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이 두려워 집으로 전화를 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일도 없는 척 호들갑을 떨었다. 저녁은 내가 쏠 테니 외식을 하자고.


그렇게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가 부모님을 모시고 자주 가던 중식당으로 향해 이것저것 시켜 먹고 하니 딱 저 숫자가 나왔다. 32,000원. 결제를 하려 카운터에서 카드를 들고 저 숫자를 맞이하는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나의 다이어리 값이 나의 '딸' 비용으로 치환되어서 나갔구나. 나에게 돈을 쓰는 것보다 부모님을 위해 쓰는 돈이 더 쓰기 편하구나, 하는.




부모님을 빛내는 자식이라는 말은 나의 존재를 누르고 부모님을 섬기는 자식, 이라는 말이었을까. 이런 건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사주에서 명시되어 나올 만큼 그저 타고난 성향이 강한 것일까? 나는 부모님을 매우 사랑하고 두 사람을 위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해드리고 싶지만 가끔은 나 스스로의 즐거움과 행복도 너무 참고 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 조금은 슬퍼지고 만다.


요즘 몸이 너무 힘든 어느 날에는 부모님의 행복하지 않은 순간들의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조금쯤은 돌리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약간은 길게 마라톤을 뛰기 위해 페이스를 조절하는 느낌으로. 오늘도 나는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안전한 거리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인지 은밀하게 고민을 이어나간다. 가끔은 내가 나를 스스로 챙기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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