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2020년 10월에 나는 잠시 미국을 다녀왔다. 오랫 만의 미국행이 설렘이 아닌 슬픔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오신 어머님이 영면에 드신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님 생전 마지막 모습일 것 같은 불안감에, 미국을 다녀왔다. 이후 어머님은 병상에 계셨지만, 그래도 삶의 끈을 이어가며, 자식들 생각과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2020년 떠나시기 전까지 나를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고,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누나는 내가 곧 올 거라는 말을 드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한 없이 편하고 깊은 잠을 주무셨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나,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신 어머니와 누나 가족...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하여 한국 입국 후 2주간의 격리 의무 기간 동안 일정 거리를 이탈하면 바로 연락이 왔다. 정말 철저한, 적어도 시스템적으로는 관리가 잘 되고 있었지만 새로운 곳으로 떠나신 어머니를 뵙기 위해 도착한 미국은 낯설었다. 내가 알던 미국과 약간은 동떨어진 그 느낌...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미국 입국자 대상으로 한 의무 2주간 격리는 없었다. 권고 사항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자유를 존중한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침해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그런데...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개인주의의 미국이지만, 사회적으로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을 때 관련된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런 미국이 아니었다.
모든 사회에 매뉴얼이 존재하고 있고 그 매뉴얼대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미국이라는 조직이 와해된 느낌이었다.
바이러스 창궐에 대한 생화학전을 대비한 매뉴얼 또한 존재하거늘 그 매뉴얼 대로도 움직이지 않은 또 다른 이유와 책임져야만 할 대상이 존재할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나는 프랑스와 영국, 약 6일간의 1차 출장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공항에서 바로 맨해튼 사무실로 복귀하니 여직원이 출장 보고서 양식이 들어있는 플로피디스크를 건네며 작성을 요청하였고 페이저는 국내용으로 교환하고 출장 중 사용하던 신용카드를 반납하였다. 이 절차 또한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보고서 작성은 예상보다는 상당히 자세한 내용을 서술 형식으로 작성하게 되어 있었고 틀린 문법이나 철자는 여직원이 수정 후 내 확인을 받고 제출되었다. 출장 후 돌아온 사무실에는 나와 같이 출장을 다녀온 동료들의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어느 나라 어느 곳을 다녀온 것인지는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나름 열심히 각자의 업무를 충실히 하고 온 표정 들이었다. 다만, 몇 번의 출장 이후 몇몇 친구들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아마 출장 기간 중 평가에서 부적합한 판단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어쩌면 그들에겐 나만큼의 절실함이 없었을 수도 있다.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었을 테고 아니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업무를 지속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본국으로 돌아가 본인이 꿈꾸어왔던 일을 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1988년은 내 개인적으로도 일자리와 함께 영주권 취득이라는 인생의 커다란 변환점이었던 해였지만 미국의 고성능 컴퓨터와 관련된 시항에서도 크나큰 변화가 시작된 해였다. 그동안 기존 Cray사의 슈퍼컴퓨터가 주 수출 근원이었다면 1988년부터 새롭게 부상한 Sun Microsystems의 슈퍼컴퓨터와 MiniSupercomputer의 물량이 대량으로 방출된 해였다. 그동안 각 나라의 국가기관 중심의 구입에서 이제 학교 및 일반 기업들도 본인들에게 필요한 수준의 고성능 컴퓨터를 구입하기 시작한 고성능 컴퓨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해 이기도 하였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도 1988년에 Cray2를 구매하였다. 나 자신이 직접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15명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춘 인도 출신 PO와 이스라엘 출신 JO가 다녀왔었다. 그들이 경험한 서울이라는 도시의 설명과 88 서울 올림픽 중계를 통해 본 여러 모습들은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것들이 많았었지만 여러모로 발전한 내 나라에 흐뭇했었다.
출장지와 기간에 상관없이 출장을 다녀온 후 2주간은 무조건 뉴욕 사무실로 출근하여 각자의 출장 보고서 작성에 하루나 이틀의 시간이 주어졌고 나머지 시간은 주로 다른 동료들의 출장 보고서에 기초한 내용과 그 외 각종 자료를 종합한 최근 동향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내가 출장 간 사이 이루어졌던 브리핑에 대한 자료는 출장 후 반드시 숙지하여야 했고 본인의 생각을 첨부한 요약 형태의 보고서 또한 제출하여야 했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란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졌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무실에서의 하루는 정말 빠듯함 그 자체였다. 더욱이 프린트된 자료는 사무실 밖으로의 반출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정시 퇴근을 한 적이 2주에 하루나 이틀 정도였었고 토요일 하루는 사무실로 나와야 했었던 것 같다.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 분량을 충분히 소화했다면 정시 퇴근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해진 시간 안에 본인의 업무를 완성해야 했다.
회사의 필요에 의한 추가 근무에는 응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지만 본인의 의무와 책임에는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결과만이 존재했다. 그 결과들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것이 나의 상급자 역할이었고 그 상급자들을 관리하는 것이 그 위 상급자들로 최고 상급자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바로 밑 관리자와의 소통만 원할하게 된다면 그 조직은 크기에 상관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유기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가장 기본적인 무기는 매뉴얼이었다.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내가 필요한 매뉴얼이 수정되거나 보완될 때마다 완벽하게 숙지할 때까지 읽고 또 읽어야만 했다.
더욱이 나는 언어의 문제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 교과 과정과 미국 생활 8년간 습득한 영어 실력으로 소화하기엔 숙지해야만 하는 내용의 양과 수준이 버거웠다. 방법은 노력뿐, 퇴근 후 전철에서는 녹음된 뉴스를 듣고 집에 도착해서는 신문과 책을 새벽까지 읽었다. 내가 들은 영어처럼 말하기 위해, 아니다 정확히는, 흉내를 내기 위해 수백 번을 연습한 단어와 문장도 있었다. 과거 어릴 적 방학 기간 동안 만들었었던 동그란 생활 표에 그려진 것과 같은 시간들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출장 중 비행기에 타고 있던 시간이 진정한 휴식 시간이 되어 주었다. 출장 횟수가 늘어날수록 각 나라마다 일을 대하는 특성들을 비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지만 뉴욕 사무실에 있을 때에는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