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랍 무기상, 미요원, 트럼프

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by 김성원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영화 같은 장면이다.

아랍 무기상과 미국 정보 요원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트럼프 소유의 요트이고 거기에는 보그(Vogue) 잡지에 나오는 수영복 차림의 모델들이 있는 곳....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상상이라는 것에 새삼 느꼈던 그날의 기억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일에 일조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 이면에 세상을 움직이기 위한 검은 활동에 미국인이 아닌 내가 대신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일까? 문득 나를 이 곳에 소개해주신 교수님이 떠오른다. 그가 나를 추천한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님 미국을 위한 것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며 그의 의도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미국은 나와 같은 처지의 이방인을 잘 활용한 느낌이다. 마치 윤흥길 소설 완장의 주인공처럼, 미국이 갖는 권력 중 일부를 이방인에게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그 권련이 완장이 되어 주인공을 도취시켜버린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 동안 그 완장에 취해있었고, 어느 순간 그 완장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그 완장을 내가 좋고 싫음이 아니라, 활용을 했더라면...... " ~~ 라면"에 대한 생각에 잠시 생각이 멈칫한다.


HR에게 나는 어떠한 존재이고 멤버였을까... 프랑스 임무를 마친 이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이켜 본다.

프랑스 임무를 마친 다음날 아침 HR과 나는 조그만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국경이 붙어있는 유럽이라 그만한 비행기로도 얼마든지 국경을 넘을 수는 있겠지만 나 같은 Green Horn (초임 직원)들에게 전달된 업무 수칙에는 국가 간 이동 시에는 반드시 미국 국적의 항공기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HR과의 동행으로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목적지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무렵 비행기는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니스’였다. 영어로는 Nice, 그 의미 그대로 말로만 듣던 유럽 최고의 휴양지에 온 것이다. 비행기 트랩을 내리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HR은 잠시 후 배를 탈 것이고 미팅을 마칠 때까지 그 배에서 대기하며 사람이던, 음식이던, 날씨던 마음껏 즐기고 있으라고 하였다. 무슨 영문 인지는 몰랐으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고 그저 내가 프랑스 니스에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던 세상 풋내기였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해변을 따라 이동하던 차는 어느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고 HR과 나는 모터보트로 안내되었다. HR과 나 그리고 우리가 타고 온 차를 운전하던 사람만이 재킷을 입고 있었던 것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자유스럽고 평화스러운 풍경이었다.


보트를 타고 바다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먼 거리에 커다란 요트 하나가 보였다.

요트로 다가 갈수록 그 크기가 점점 더 커져갔고 그런 크기의 요트는 잡지에서도 못 보았던 것 같다. 지금이니 요트라 말하지만 당시 내 기억에는 마치 커다란 여객선을 본 느낌이랄까, 보트가 요트 뒤편으로 가자 보트의 높이와 비슷한 곳이 나왔고 HR과 나는 아주 편안하게 요트로 옮겨 탈 수 있었다. HR은 우리를 맞이한 승무원인 듯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고 미팅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아마 이전에도 만났던 적이 있던 서로가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요트의 이층으로 올라가자 조그만 수영장이 있었고 주위로는 썬베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일광욕을 즐기는 여자들과 이곳저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가 여러 명 있었다. HR은 또 다른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어디론가 갔고 나는 수영장과 인접해 있는 바에 앉아 지중해의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HR의 말처럼 즐기기보다는 어색한 긴장감에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내게 HR과 인사를 나누었던 승무원이 음료수를 건네며 물어보지도 않은 요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이 요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요트이고 현재는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본인의 보스가 원래 소유주였었고 얼마 전 어느 미국인에게 매각하였다고 하였다. 수영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여자들은 모두 보그(Vogue) 잡지에 나오는 모델들이고 하루 일당이 이천 달러이며 저녁엔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는 등 넋두리인지 자랑인지 아니면 장소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재킷에 땀을 흘리며 멍하고 있는 젊은 동양인 남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깃거리였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하였다. 당시 내 월급이 삼천오백 달러 정도였는데 한 사람 일당으로 이천 달러를 지급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며 HR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미팅을 이런 요트에서 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은 한 시간 정도 후 HR과 함께 선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HR 쪽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HR의 뒤에서 중년 신사와 함께 작은 키에 뚱뚱하고 대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아랍 남자가 나왔다. "ㅇㄷㄴㅋㅅㄱ". 선실 앞에서 HR의 뒤나 옆에 서서 중년 신사와 "ㅇㄷㄴㅋㅅㄱ" 간의 아주 짧은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중년의 신사는 말은 협력에 감사하다는 것이었지만 그 억양으로 보아 반어법과 같은 느낌이었고 "ㅇㄷㄴㅋㅅㄱ"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답으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70,80년대 세계를 무대로 무기를 거래하여 막대한 부를 이룩한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무기상.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듯이 그의 사업도 1988년 당시 파산신청 중이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도움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더 이상의 효용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몇 년 전 일어났었던 이란 콘트라 사건에서 미 정부에 불리한 증언을 했을지도 모르는 무수한 역학 관계에서 미국은 그와 잡은 손을 놓았던 것이다. 당시 나 같은 위치에서 그와 같은 사람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란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자리에 있게 한 HR의 의중도 알 수 없었다. 물어볼 기회가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지만 아마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ㅇㄷㄴㅋㅅㄱ"의 요트를 구매한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였고 트럼프는 그 배를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뉴욕 항에서 열리는 퍼레이드에 선보였다고 하였다. 아마 지기 싫어하는 것은 트럼프의 원래 성격인 것 같다. "ㅇㄷㄴㅋㅅㄱ"의 요트를 구매함으로써 본인이 우월하다는 증명과 과시가 목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트럼프가 어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요트의 운영비용에 대해 언급하면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서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될 것 같다”라고 하였다면 그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img.jpg 트럼프 요트


나와 HR 그리고 묘령의 중년 신사는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를 타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HR과 내가 St. Malo에서 타고 온 그 비행기는 아마도 그 중년 신사를 위한 것이었고 중간에 HR을 태우러 온 것으로 추측된다. "ㅇㄷㄴㅋㅅㄱ"와 모종의 거래나 최후통첩을 위해 온 꽤 높은 직책의 정부 사람 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 후 중년 신사는 HR에게 워싱톤에서 보자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고 HR과 나는 내일을 위해 드골 공항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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