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냉전종식과 브란덴버그 연설

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by 김성원


HR과 함께 워싱턴 D.C 상무부 도착 시간은 오전 09시 30분, HR과 나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가끔씩 큰 소리들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설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HR과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온 사람은 가슴에 달린 신분증을 대조한 후 짧은 통성명과 함께 곧바로 사무실 안으로 안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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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의 분위기는 사무실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만큼이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긴 회의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상무부와 IBM 직원이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고 중앙에는 노신사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나와 HR은 노신사의 맞은편에 앉았고 노신사의 요청에 따라 이름과 소속을 말하였다. 노신사는 본인의 직책이 상원의원으로 대통령 직속 기구인 수출자문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라고 소개하였다. 상원의원은 본인 소개가 끝나자마자 영국에서 내가 들었던 IBM과 관련된 내용을 다시 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나는 내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 그대로 IBM의 사천만 달러 지원설에 관하여 답하였다.


아마도 우리가 참석하기 전 회의에서 IBM은 지원설 내용을 부인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대답과 HR가 수집한 더 상세한 내용을 듣자 감출 수 없을 만큼 긴장된 표정들을 지었다. IBM의 주장은 유럽 내 대학교에 한하여 학술적 지원 차원이었다는 이유로 상무부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IBM의 짧은 변명을 듣고 HR과 나는 회의실을 나왔다.


이후 IBM이 약속한 유럽 대학 지원에 대한 결과는 알 수 없었으나 몇 개월 후 고성능 컴퓨터에 관한 이전보다 더 세분화된 연산 능력별 등급이 다시 정해졌고 수출과 관련된 가이드라인도 재정비되었다.

이미 충분한 기술력을 갖춘 일본을 비롯하여 자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상무부와 IBM 간 수출 가이드라인 관련한 적절한 거래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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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부 건물을 나온 우리는 건너편 프레지던트 공원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는 백악관이 왼쪽으로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기 위한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였다. 워싱턴 DC의 그 어떤 건축물도 이보다 높게 지을 수는 없도록 건축법을 정할 만큼 자신들의 국부를 기념하고 있다. 실제로 워싱턴 DC에는 13층 이상의 건축물이 없다. 물론 백악관이나 주요 정부 기관들의 경호와 보호를 위한 측면도 있겠지만 이 기념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동서로는 링컨 기념관과 국회 의사당이 남북으로는 3대 대통령이자 헌법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과 백악관이 일직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


링컨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를 국회가 잘 지켜 나가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며 제퍼슨은 자신이 기초한 헌법을 대통령이 제대로 수호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백악관에서는 포토맥 강 건너 알링톤 국립묘지가 보인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인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이니 제대로 하라는 것인지 사실을 떠나 괜찮은 아이디어이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공원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둔 시기였고 표면적으로는 레이건 행정부 8년 동안 경제적 정치적으로 국민들의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여 왔던 터라 부통령인 부시(아버지)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었던 분위기였다.


HR은 공원을 걸으며 식당과 같은 막힌 장소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HR은 냉전 종식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87년 레이건 대통령의 베를린 장벽을 허물자 라는 브란덴버그 연설이 있긴 하였지만 현실이 아닌 정치적인 이벤트라고 느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HR의 단계적인 설명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그 경우 발생하는 미국 내 정치 변화와 세계정세에 관한 본인의 생각들을 말하였지만 내게는 실감 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 년 후 HR의 말은 대부분 사실의 역사가 되었고 그 사이 우리들의 업무에도 많은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자유진영의 맹주인 미국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함은 물론 군사력이 아닌 정보 전쟁으로 판도를 바꾸려 했었던 미국의 계획은 조용히 발톱을 갈고 있었던 중국의 부상과 함께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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