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란 무엇인가. 타인을 불편케 한 언행이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후회를 표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일 게다. 사과는 자발적 성찰과 반성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타인의 꾸짖음에 뒤따른다. 지난 1월 음력 설 직전, 걸그룹 뉴진스의 다니엘이 뉴진스 전용 소통 앱 포닝에서 영어로 “버니즈(공식 팬덤 명칭) 여러분 설날에 뭘 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가 이틀 뒤 사과했다. 비슷한 시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2023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말레이시아 국적의 화교 배우 양자경도 설 인사 후 팬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다니엘은 설날을 “차이니즈 뉴이어(Chinese New Year)”라고 표현했고, 양자경은 설날에 “차이니즈”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지난 1월 13일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은 음력 설을 맞아 “Celebrating Seollal 설맞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전통 음악과 무용을 소개하는 행사를 트위터에 광고했다. 해당 박물관은 영국인에게 생소한 설날(Seollal)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코리안 루나 뉴이어(Korean Lunar New Year)라고 썼다. 즉 한국에서 쇠는 음력 설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트윗을 중국 웨이보에 재게시한 후, 중국 네티즌들은 “중국 문화를 훔치는 한국을 돕는 대영박물관”은 “중국인에게 사과하라”라며 욕설과 성난 트윗을 쏟아냈다. 대영 박물관은 이후 해당 트윗을 삭제했고, 대신에 토끼를 안고 있는 청나라 시대 여성의 그림을 올리고 “ChineseNewYear”라고 해시태그를 달았다.
중국 네티즌 혹은 소분홍(小粉紅-샤오펀훙)은 해외에서 중국의 문화가 침탈된다고 여기면 온라인에서 전랑(战狼·늑대전사)외교를 펼친다.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도를 넘는 주장도 많다. 한복은 중국 명나라 의복이고 김치도 중국의 전통음식이라 강변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인기로 갓 열풍이 불었을 때는 중국이 갓의 원조라고 우겼다. 사실, 인접국 간에는 역사와 문화를 둘러싼 갈등과 충돌이 잦다. 동질적인 언어와 역사를 지닌 페루와 칠레는 증류술 피스코(Pisco)와 날생선 샐러드 세비체(Ceviche)의 정통성을 놓고 싸운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날생선 샐러드 유생(Yusheng)의 원조 논쟁을 벌이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대표하는 전통무용의 뿌리를 놓고 갑론을박한다.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전통무용과 태국 전통무용도 유사한데, 2008년에 캄보디아가 양측이 공유하는 요소인 ‘손가락을 우아하게 구부리는 동작’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 태국이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을 기리자는 의도로 출발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민족주의적 경쟁이 치열해지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전 지구적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에 일본 여행을 했는데, 호텔 방 책상 위에 성경이나 불경이 아닌 천황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신화서인 <고사기(古事記)>가 비치된 것을 보았다. 중국은 2012년 시진핑 집권 이래 배타적 애국주의가 극성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전쟁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슬라브 민족주의에 기반한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큰 몫을 차지한다. 이스라엘, 터키, 이태리, 헝가리 등 여러 국가에서 우파민족주의 세력이 집권했으며, 심지어 미국에서도 포용적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우파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징후가 발견된다.
이들은 문화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자국의 문화는 고유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원형대로 보존해야 하며, 타국의 침탈과 훼손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민족주의적 시선은 한류에도 침투한다. 지난해 9월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앤드앨버트(V&A) 뮤지엄은 <한류! 더 코리안 웨이브> 전시를 9개월 예정으로 시작했다. 170여 년 역사의 권위 있는 박물관에서 한류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자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필자도 부대행사인 한류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김에 그 전시를 참관했다. 전시는 한류의 여정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아티스트와 콘텐츠를 시기별, 주제별로 배치했다. 영국 관람객을 위한 배려인 듯,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졌다. 그런데, 이를 취재한 한 한국 언론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건 결코 한류가 아니다.”라고 분개한 듯 보도했다. 하지만 걸그룹 마마무의 화사가 케이팝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궈낸 아름다운 혼종”이라 잘 정의했듯이, 한류는 한국 것이기도 하지만, 인류문화의 총체적 수용체이기도 하다. 한국 콘텐츠에 포용성이 없다면 오늘과 같은, 세계 곳곳의 한류 현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후기식민주의 학파에 의해 발달한 혼종성(hybridity) 이론은 순수한 전통이나 독자적인 자국 문화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화는 다른 문화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하기 때문이다. 일테면, 멕시코의 마야문명 유적지에서 관광 상품으로 팔리는 원주민의 전통의상은 실제로는 스페인 등 여러 외부세력의 문화적 영향에 따라 변형된 것이다. 이태리 음식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토마토는 불과 15세기에 유입되었다. 외국에서 흔히 한국인 정체성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김치의 매콤한 맛은 고추가 유입된 임진왜란 이후에야 가능했다. 한국인의 일상적 소울푸드인 짜장면은 한식과 중화요리 사이에 놓인 경계 음식이다. 즉, 혼종성 이론은 문화의 원조보다는 문화가 사람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실천되는가 하는 것을 중시한다. 이를테면, 문화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이 유의미한 것이다.
물론, 문화에 근거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사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의 긴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특정 문화의 성격과 양태는 일시성을 띤다. 문화의 개념을 좀 더 논의해 보자. 문화(culture)는 “가꾸다, 키우다,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colere”에서 시작해 교양과 예술로, 그리고 민족문화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즉, 문화는 결코 자연(nature) 그대로 주어지거나 확보된 것이 아니다. 특정 지역의 역사를 거쳐 형성되고 개선된 것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그 속성으로 한다. 문화는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변화할 것이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현대 대중문화 분석에 있어 가장 영향력이 큰 이론체계이자 학문운동이다. 이 문화연구도 문화를 고정된 개념이 아닌 다원주의적 실천으로 바라본다. 문화연구에서는 창의성을 발휘해, 물려받거나 주어진 ‘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개인의(그리고, 하위문화의) 행위성을 중시한다.
다시 차이니즈 뉴 이어 명칭 문제로 돌아가자. 미국 뉴욕시 플러싱 지역은 유태인, 이태리계, 그리스계 이민자를 거쳐 1970년대 한인, 1980년대 중국인이 상권을 개척한 곳이다. 1980년대에 설날이면 플러싱 한인들은 떡국을 나눠 먹고 함께 윷놀이를 즐겼으며, 중국인들은 사자 탈춤을 추고 퍼레이드를 했다. 음력 설이어도 각기 다른 문화적 실천인 것이다. 1990년대 들어 플러싱의 미국인, 한인, 중국계 이민자들은 음력 설 명칭을 “루나 뉴 이어”로 통일하기로 합의했으며, 1999년부터는 “루나 뉴 이어” 페스티벌을 함께 치르고 있다. 또한, 음력 설을 미국 공휴일로 만들자는 캠페인을 전개해, 결국 2015년에 이를 이뤄내는 쾌거를 거뒀다. 미국 사회 내에서 약자일 수 있는 이민자그룹의 단합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사실, 중국인들은 유럽, 미주,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에 일찍부터 이민해 차이나타운을 곳곳에 건설했다. “차이니즈 뉴 이어”라는 단어는 주류사회가 타자인 중국인의 관습을 일컬은 것인데, 이후 화교커뮤니티로 확산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 문화학자 Liew Kai Khiun 은 소셜미디어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썼다: “음력 설에 나는 곧잘 영어로 ‘해피 차이니즈 뉴 이어’라고 인사한다. 하지만 ‘中華新年’(중화신년)이라는 한자단어를 들어본 적은 없다. 정작 중국에서는 춘제로 부르는데, 이를 베트남에서는 테트, 한국에서는 설날, 티베트에서는 로사르라고 달리 부른다. 영어로 쓸 때 ‘루나 뉴 이어’가 더 나은 이유는 이 단어가 아시아 여러 지역의 다양한 새해맞이 행사를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1980년대만 해도 영국문화연구(British Cultural Studies)로 불리었다. 1960-80년대 영국의 버밍엄대학교를 중심으로 해 일군의 학자들이 영국에 적합화된 이론과 문제의식으로 자국의 문화 현실을 분석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영국”문화연구라 불리지 않는다. 그 이론과 문제의식이 세계 전역으로 퍼져 각 지역의 문화를 분석하고 더 나은 문화환경과 실천을 고민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론에서 기사작성의 표준ㅇ로 삼는 AP통신 스타일북(Associated Press Stylebook)은 “차이니즈 뉴 이어” 대신 “루나 뉴 이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이제까지의 논술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이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서구제국주의로부터 당한 근세 100여년간의 역사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한 중국은 ‘위대한’ 중화 질서를 회복하고, 서구가 정한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다른 차이니즈 스탠더드를 구축하겠다는 의식이 강하다. 지난 2021년 3월 미국 앵커리지에서 열린 미·중 고위급회담은 두 개의 세계관이 정면충돌한 사건이다. 외교회담답지 않게 양측은 거친 언사를 주고받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웨이보에 1901년의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 사진을 올렸다. 신축조약은 외세에 저항한 의화단(義和團)운동의 실패 후, 청나라가 서구 열강 11개국과 체결한 굴욕적인 조약으로 중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웨이보에는 “중국은 열강에 괴롭힘을 당했던 과거의 그 중국이 아니다.” “다시는 무릎꿇지 않을 것이다." 등 분노에 찬 댓글이 가득했다.
결국,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다는 자부심을 지닌 중국인은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행해지는 문화적 실천의 다양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화의 기원과 유래에만 집착한다. 결국, 피자, 햄버거, 축구, 스키, 골프마저 모두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식의 “만물 중국 기원론”까지 주장한다. 중국 밖의 세계와는 다른 문법으로 문화를 인식하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우리의 이웃이다. 상대를 더 많이 알고 상대와 더 자주 소통하는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