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년작). 얼마 전 생을 마감한 일본의 거장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와 영국 글램록의 전설이자 20세기 문화 아이콘 데이비드 보위가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울림이 큰 영화다. 일본영화 수입 개방 전 작품이라, 국내에선 공식상영 기록이 없는 거로 알고 있다(불법복제는 돌아다녔고..ㅎ). 여전히 국내에선 이 영화를 볼 수 없어서 VPN을 설치해 미국 영화 사이트 Criterion Channel에 접속해 결국 보았다.
여러 잣대에서 이 영화를 평할 수 있겠지만,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100% 남성들만 등장하는 영화가 재미있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정돈된 연출, 흥미를 부여하는 캐스팅(두 음악거장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다! 성격배우 기타노 타케시의 젊은 시절 모습도 인상적!)과 은근히 긴장감 있는, 우리에겐 덜 알려진 서사가 끝까지 영화를 보도록 이끌었다. 전쟁이 극성이던 1942년, 땡볕의 인도네시아 자바섬이 배경이다. 제네바협약은 동네 개에게나 던져줬다는 듯, 아무 때나 할 것 없이 구타와 학대를 자행하는 일본군. 핏발 선 표정의 그들과 포로임에도 인간다운 질서를 유지하고 미소를 건넬 줄 아는 영국군 간의 대비가 강렬하다. 일본군 간에는 불필요한 대화 없이 절대복종의 긴장감만 흐르는데, 영국군 포로는 일본군의 지시에도 따박따박 말대꾸를 한다(그럴 때마다 개머리판으로 맞지만..)
원작 스토리는 로렌스 판 데르 포스트(Laurens van der Post)가 2차 대전 당시 자신의 포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영국과 일본의 전통문화를 이항 대립적으로 설정한 장면이 자주 나온다.
조선인도 등장하는데 병졸도 아니고 수용소 간수다. 하필 영화의 첫 장면은 조선인 간수가 네덜란드인 포로를 돌보다 강간혐의로 처형되는 장면.. (사족으로 한마디 하자면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을 동남아 각지 포로수용소 간수로 활용했다. 2000년대 초반 필리핀 한류를 연구하다가 필리핀 내 노년층 사이에 잘 알려진 한국어가 "아파?"라는 단어라고 들었다. 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간수로 임명된 조선인들이 필리핀 포로를 고문할 때, "아파? 아파?" 하며 강도를 더해가며 학대했다는 뒷얘기...)
영화 중, 장교와 군속 사무실마다 “팔굉일우”(八紘一宇) 글씨가 족자로 만들어 걸려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팔굉일우(八紘一宇)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으로,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가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였다. 당시 조선 전역에 팔굉일우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재미없다는 식으로 썼지만, 반전이라는 주제의식이 뚜렷한 수작이다. 명징한 연출로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은 크리스마스의 화해를 배경으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지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했다. 크리스마스 날, 영국군 포로들이 찬송가 "Rock of Ages"를 조용히 합창하는 장면은 오래도록 잔상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