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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 Sep 09. 2020

'모텔 소믈리에'라고 들어보셨나요?

  '모텔 소믈리에 (MOTEL Sommelier)'


  처음 들어보는 단어일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MOTEL과 Sommelier의 합성어'로 '숙박업소를 잘 선정해 추천하는 전문가' 정도가 되겠다. 사실 모텔 소믈리에는 내가 가진 별명이다. 방송 경력 20년 차인 내가 그동안 전국의 출장지에서 괜찮은 모텔을 제법 잘 찾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니 여성인 나에게 이런 별명이 붙여진 걸 오해하지 마시길. 출장을 가게 되면 그 지역에서의 숙박은 필수고, 얼마 안 되는 출장비로 가능한 곳을 찾아야 했다. 예능팀이나 드라마 촬영팀처럼 수십 명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속한 다큐멘터리 촬영팀도 스텝이 10~12명 정도나 되기 때문에 그 인원들이 한 곳에 머물 숙소를 구하는 건 조금 까다로웠다.


  첫째, 3박 4일에서 4박 5일의 출장기간 동안 짐을 그대로 두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하루 숙박비 기준 4만 원(몇 년 전까지는 3만 원이었음)이면서 시설이 깨끗해야 한다.

  셋째, 여름에는 에어컨이 잘 작동되는지, 겨울에는 난방이 잘 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이었는데 숙박비가 저렴한 곳만 찾으면 시설이 좋지 않았고, 시설이 좋으면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숙소를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론 시설과 가격 모두 좋지만 주차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다른 곳을 찾아야 하기도 했다. 물론 여행 온 게 아니니까 아주 좋은 곳에 머물 필요까지는 없다. 일하다 보면 수면시간이 생각보다 적기 때문에 잠을 자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치르는 것도 아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쉴 때 제대로 못 쉬면 다음 날 촬영이 힘들어지니까 숙소를 대충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원이 열명 이상이 되다 보니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기준도 다 달랐다. 욕조가 있는 방을 찾는 사람, 침대방보다 온돌방을 선호하는 사람, 흡연을 해야 하는 사람과 담배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금연 방을 요구하는 사람, 와이파이가 빵빵하게 터지는 방이 필요한 사람 등 각자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켜 줘야 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조건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출장비 예산 안에 들어와야 '오케이'였다. 무슨 숙소 하나 정하는 데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짐을 풀고 나서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짐을 챙겨 나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촬영이 이어지면 중간에 숙소에 들어와 짐을 빼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부터 숙소를 잘 정해야만 촬영 기간 내내 편하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누가 뭐라 해도 모텔 선정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모텔 소믈리에인 나만의 노하우를 공개하겠다. 우선 출장 가기 전에 미리 전화로 예약하지 않는다. 예약 안 하고 가면 불안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미리 예약하게 되면 제 값을 다 주고 갈 확률이 높다. (단, 극성수기나 모텔이 거의 없는 섬을 갈 경우는 특수한 상황으로 원하는 조건에 맞지 않더라도 예약은 필수다.) 촬영지에 도착할 때쯤 휴대폰을 꺼내서 지도 앱을 이용해 주변 모텔을 검색한다. 그래야 촬영지에서 가까운 거리를 찾는 일도 비교적 정확하다. 이때 모텔 홈페이지에 실린 내부사진은 참고는 하되, 사람들의 평점과 후기를 꼼꼼히 살펴본다. 깔끔하고 넓게 나온 사진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꽤 많으니 100프로 믿지 않는다. 사진은 얼마든지 보정이 가능하니까.


  후기를 읽고 난 뒤 어느 정도 검증이 된 모텔을 찾으면 바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주인장과 통화를 시도한다. 여기서 나는 "여보세요?" 하는 상냥한 주인장의 목소리 한마디만 들으면 이 모텔가도 될지 판단이 다. 인심 좋은 주인장을 만나면 먼저 짐 놔두기, 저렴한 가격, 깔끔한 시설-우리의 요구조건 3가지를 읊으며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말이 협상이지 주인장과 내가 밀당을 하면서 흥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을 여러 개 쓰는데 하루 5천 원씩 빼주면 현금으로 결제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주말 요금도 주중 요금으로 계산할 수 있게 만든다. (사실 출장비에는 주중 요금과 주말 요금의 차이가 없는데 대부분 출장기간에는 주말이 끼어있다.) 주인장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현금으로 들어오게 될 목돈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주인장이 '대어를 낚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게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고 현금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모텔 주인도 손해 볼 일은 없다. 가격 흥정이 잘 안될 때는 다른 곳을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손님을 놓칠까 봐 서둘러 붙잡는다.  


  전화로 이 모든 조건이 맞춰지면 그때 이동하는데, 모텔에 도착하면 나와 조연출 둘만 내린다. 나머지 인원은 그대로 봉고차에서 대기한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협상단처럼 비장하게 걸어가서 모텔 주인을 만나고, 빈 방 하나를 열어달라 해서 직접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눈으로 내부시설을 확인하고 나서야 최종 결정을 한다. 차로 돌아와 문을 열고 "오케이~ 짐 풀자!" 하면 모두들 환호하며 박수를 쳐줬는데, 이 때는 정말 내가 아주 중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계약한 사람처럼 어깨가 봉긋 솟아오른다. 고작 괜찮은 모텔을 찾아 하루 5천 원씩 깎고 출장비가 오버되지 않게 한 일인데, 모두를 기쁘게 한 것 같아 뿌듯하다 못해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


  한 번은 모텔 때문에 함께 출장 간 운전기사님과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나는 그동안 무조건 저렴한 모텔을 찾았던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찾으면서 가격도 저렴한 곳을 찾아왔었는데, 내가 정한 곳에 짐을 풀려고 하는데 기사님이 막아섰다. 10년 넘게 숙소를 정해왔던 나의 고유권한을 침해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아본 건너편 모텔이 하루에 5천 원씩 더 저렴하다며 그곳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동안 나를 신뢰해 온 제작진과 스텝들이 잠시 망설이는 게 보였다. 그곳은 가격이 더 저렴했지만 사람들의 후기가 좋지 않아서 제외시켰던 모텔이었는데, 그는 촬영팀의 수장인 피디한테 가서 건너편이 더 좋다며 설득했다. 멋진 협상 전문가에서 모텔 호객 행위하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아 그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정 그러시면 기사님은 그곳을 이용하세요. 우리는 이 곳으로 정했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촬영팀은 모두 내가 정한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내 결정에 마음이 상했는지 그는 나를 째려보듯 쳐다보며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무슨 여자가 모텔을 잡는다고 나서는 거야."


  그날 내 귓가에는 계속 "무슨 여자가~"라는 말이 맴돌았고, 그는 하루 종일 투덜거리다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기 숙소 자랑을 늘어놨다. '그만 좀 하시지.' 그날로 난 그와 불편한 사이가 됐다. 모텔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하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근데 출장 이튿날, 우리 숙소에서 나오는 그를 목격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가 그때 유행했으면 내가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건너편 숙소가 에어컨이 너무 오래돼서 시원하지 않아 옮겼단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좀 멋쩍어하며 말했다. "여기 숙소 괜찮네~" 속으로 미묘한 쾌감이 솟구치면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의 말만 믿고 숙소를 정했더라면 이 많은 인원이 다시 짐을 싸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거 아닌가. 그 일을 계기로 역시 '모텔은 내가 전문가다'라는 걸 재확인했다.


  뭐라도 잘하는 건 장점이라 생각해 모텔을 잘 잡는다는 걸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어디에서든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은 나더러 노후에 모텔 사장이 되라고도 했고, 그동안 정했던 모텔 리스트를 잘 정리해 책을 내보라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슨 모텔을 갖고 그런 걸 하냐며 웃어넘겼다. 모텔을 정하는데 공을 들였고 나름 노하우가 있었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몇 년 뒤, '야놀자', '여기 어때'와 같은 숙박 관련 앱이 출시되는 걸 보고 뒤통수 한 대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노하우가 생겨 모텔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 일수도 있었다. 눈 앞에서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기분이었다. 에휴,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나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인가. 아쉽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고 없다. 요즘은 나도 출장 가게 되면 주로 숙박 검색 앱을 이용해 모텔을 찾는데, 그때마다 내가 모텔 소믈리에의 실력으로 숙박 검색하는 앱을 먼저 만들었으면 지금의 삶이  더 풍요로워졌을까, 가끔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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