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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 Sep 14. 2020

첫눈에 반하다

 

  '강렬한 노오란 옷이 유독 빛났고, 기다란 몸매를 뽐내며 유혹하듯 누워있는 너에게선 난생처음 맡아보는 낯선 향기가 났다. 아주 달달한 향이 온몸에서 퍼져 나와 내 코끝을 자극했다. 은은한 바닐라향처럼 고급스러운 느낌이랄까. 아마 난 그때 너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특히 옷 속에 숨겨진 너의 뽀얀 속살이 내 혀끝에 처음 닿았을 때 그 황홀함은 잊을 수가 없다.  내 곁에 두고 널 사랑하고 싶다.'


 내 나이 열 살에 처음 만났던 '바나나'에 관한 첫인상이다. 80년대 후반 즈음 우리 동네 과일가게에 바나나가 처음 등장했는데, 그 몸값이 워낙 고가인지선물용이나 아주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다. 외국에서 건너온 바나나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그 가격을 알고 나면 대부분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바나나 한송이가 만원을 훌쩍 넘을 정도로 비싸서 주로 낱개로 떼어 파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내가 기억하는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은 대략 2천 원 정도. 그 당시 물가로 2천 원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의 한 달 용돈과 맞먹는 액수였다. 내가 즐겨먹던 '깐돌이'라는 아이스바 한 개가 50원이었으니까 2천 원짜리 바나나 한 개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하굣길에 항상 지나치는 과일가게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바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과연 어떤 맛일까 상상했다. '언젠가 내가 바나나 너를 꼭 먹어주마'하고 침을 삼키며 참았고, 날마다 "바나나, 바나나~"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졸라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큰 맘먹고 그 귀한 바나나를 두 개 사 오셨다. 엄마는 처음 사온 바나나를 도마에 올려놓고 잠시 고민하더니 몸통을 반으로 자른 후에 하나씩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하,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고선 다른 하나는 바나나를 세운채 껍질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훌러덩 벗기셨다. '우와~' 신기하게 지켜보던 우리 3남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엄마는 바나나를 한입 크기로 잘라주셨고 난 조금 더 큰 조각을 먹으려는 욕심에 재빨리 손을 움직이며 내 몫을 챙겼다. 드디어 내 입술이 바나나를 영접하는 순간, 바나나 조각은 혀끝에 부드럽게 닿아 입안 가득 달콤한 맛과 향기를 퍼뜨렸다가 사르륵 녹아 없어졌다. 그 맛을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달콤함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 그 자체였다.

 



 바나나에 대한 호기심은 어린아이들만 갖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8살 난 여동생이 부모님을 따라 가락시장에 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다름 아닌 바나나 때문이었다. 장을 보러 나서는 부모님한테서 동생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을 기대하며 따라나섰고, 시장에서 바나나를 보고 사달라고 떼를 써 엄마의 지갑을 여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큼직한 바나나 한 개를 손에 넣고 기분 좋아진 동생이 한입 먹으려는 순간, 아빠가 한입만 맛보자고 했단다. 살짝 마음 약해진 동생이 인심 쓰듯 바나나를 아빠에게 먼저 양보했는데, 아빠는 입을 크게 벌려 바나나를 깊숙이 한입 베어 물었고 몸통이 반이나 달아나고 없어지는 걸 눈 앞에서 본 동생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생은 가끔 웃으며 옛 추억의 바나나를 떠올렸는데, 그 시절 바나나는 '온전히 한 개를 다 먹어보지 못한 아쉬움'이라고 했다.


 사실 내겐 지금까지도 오빠와 동생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 동생이 알게 되면 좀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소풍 가는 날, 버스에 오르기 전에 엄마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지 하나를 배낭에 넣어주셨다. "이게 뭐야?" 하고 만졌는데 길쭉한 것이 바로 바나나였다. 바나나의 깜짝 등장에 난 히죽히죽 웃으며 버스에 올랐고, 한껏 들뜬 마음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나 지금 먹어도 돼?"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이따가, 버스 출발하면 가면서 먹어~" 근데 배낭을 살짝 열어 봉지를 들춰보니 바나나가 두 개나 들어있는 게 아닌가. "엄마~ 근데 나 이제 먹으면 안 될까?" 빨리 먹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한테 몇 번을 더 물어봤는지 모르겠다. 그땐 왜 그렇게 먹을 것 앞에서 참을성이 없었을까.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자 나는 얼른 배낭에서 바나나를 꺼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내 옆자리에 짝꿍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혼자 두 개 다 먹고 싶은데 이걸 어쩌지? 옆에 친구가 있는데 혼자 먹을 수도 없고.' 잠시 갈등하다가 그녀에게 바나나 한 개를 내밀었다.


"우리 얼른 같이 먹자."

"난 나중에 먹을게."

 

 그녀는 바나나를 자신의 배낭 속에 집어넣었고, 난 재빨리 바나나 한 개를 흡입하다시피 먹어치웠다.


'도대체 언제 먹을 거지?'


난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짝꿍한테 바나나에 미련이 남아 그녀의 배낭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풍의 즐거움에 푹 빠져 놀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김밥을 나눠먹기 위해 모여든 친구들은 각자 싸온 도시락을 꺼냈는데, "꺄악~~ 이게 뭐야"하며 짝꿍이 소리쳤다. 그녀의 배낭 속에 있던 바나나는 납작하게 눌려 터져 버렸고, 어느새 뽀얗던 속살은 시커멓게 변해 흐물흐물해졌다.


'하아~~ 저게 어떤 바나나인데...'


 그냥 주지 말고 나 혼자 다 먹을 걸 하고 후회했다. 그 귀한 바나나를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짝꿍에게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나나 때문에 엉망이 된 배낭을 휴지로 닦고 있었다.


 "야, 빨리 먹으라니까 안 먹고 있다가 이게 뭐야?"


 난 속상한 마음에 그녀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바나나가 터지는 건지 몰랐어."


 그래, 사실 그땐 나도 몰랐다. 압력을 가하면 바나나가 터질 수 있다는 걸.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한때 바나나는 내게 그 무엇보다 '귀한 존재'였다. 그 시절 우리의 삶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가 탄생한 것, 어려웠지만 추억할 수 있는 그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예전보다 풍요로워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내가 첫눈에 반해버린 바나나'와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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