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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 Jul 23. 2020

1人 1깡은 필수입니다

누구에게나 깡은 있다

 - “깡은 있어요?”

 - “네, 있습니다.”


  첫 직장 신입 PD 채용면접 때 면접관이 나에게 한 질문이었다. 그는 약해 보이는 마른 체격에 잔뜩 긴장한 나를 보고, 방송일은 생각보다 힘드니까 못하겠으면 깡으로라도 버티라고 했다.  2000년 10월, 나는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일자리가 안정되지 않아 취업 대신 휴학을 하거나 대학원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 또한 취업이 어려울 거라 생각해 자포자기했는데, 깡 하나로 버티겠다는 다짐을 하고 취업에 성공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첫 출근의 설렘도 잠시, 이 회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늘 긴장하고 열심히 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만 생각했고, 회사에 남아 밤새 일을 하고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오다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야근과 밤샘 작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았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노력한 만큼 하루하루 실력이 늘었고 칭찬받는 횟수도 함께 늘었다. 일하는 재미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한 번은 입사 3개월 차 신입 PD일 때 베테랑 촬영 감독과 일을 하게 됐다. 의 앵글을 보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촬영해 줄 것을 요구했다. 편집이 잘 되려면 이렇게 촬영해야 한다는 충고에도 고집을 부렸다. 과묵한 카리스마의 촬영 감독은 카메라를 둔 채 “네가 찍어.”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지고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촬영을 못했으니 큰일이었고 모든 게 내 책임이었다. 상대방의 경험을 존중하지 않고 내 의욕만 앞세운 게 결국 일을 크게 만들었다. 고민 끝에 그를 찾아가 사과하고 설득한 끝에 촬영은 무사히 마쳤다. 그 날 촬영한 테이프를 들고 화장실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이라는 게 고집을 부리라는 게 아님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어느덧 첫 직장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깡으로 버틴 시간 치고는 꽤 긴 시간이었다. 회사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일도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다 한 번의 위기를 만났다. 내가 아닌 먼저 입사한 대학 선배에게 닥친 위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선배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서 방황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주눅 들어 있었고 소극적이었다. 그런 선배의 행동이 의욕 넘치던 나와 비교되기 시작했다. 내가 열심히 일할수록 선배를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선배의 업무능력이 맘에 들지 않았던 팀장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자신의 방으로 나를 슬쩍 불러 조만간 선배를 내보낼 생각이니 그전에 가 아는 것들을 다 배워두라고 했다. 선배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혼을 앞둔 선배를 보고 있자니 안타까웠지만, 앞으로 닥칠 상황을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선배는 3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열심히 했고, 스스로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 있는 일만 하려고 했고, 조금 더 고민해야 하는 일엔 귀찮아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멈췄던 것이다. 어느 정도 실력이 늘자 거기서 만족하고 현실에 안주해버린 거다. 선배의 위기가 나의 일처럼 느껴져 갑자기 두려워졌다. 회사는 일한 기간보다 업무를 처리하는 태도와 노력을 계속 지켜보고 평가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나는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아니 네가 왜 갑자기 그만둬? 선배를 나가게 할 거라니까.”


  팀장은 상당히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주변에서도 내 결정에 당황스러워했고 다시 생각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퇴사하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어쩌면 날 더러 선배를 대신해 퇴사까지 한 배려심 많은 후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니다. 아무렴 내가 남을 대신해 직장까지 그만뒀을까.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사회는 참 냉정하구나. 선배가 겪은 위기는 언젠가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야. 더 이상 나의 거취를 회사가 결정하게 두진 않겠어.' 솔직히 취업하기 어려운 시기에 이 경력으로 재취업이 가능할지도 미지수여서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용기 내지 않으면 나도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퇴사했고, 선배는 회사에 남게 됐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위기는 있다.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예측하기 어려울 뿐. 그렇다고 나의 성장을 위해 회사가 충분히 기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키려면 나만의 경쟁력을 갖춰하고,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걸 보고, 배우고, 경험해야 했다. 어디서든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로 마음먹고 미련 없이 회사 밖으로 나왔다. 나를 배웅하러 나온 선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선배, 안되면 그냥 깡으로 버텨요.”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나가는 걸 보고 자극받아 더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자신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고 했다. 선배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나 또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방송일에 도전했다. 그때 내가 무슨 깡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와 선배 모두를 성장시킨 건 분명했다. 살면서 그 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지만 깡으로 버티면 다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가장 나다웠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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