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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17. 2022

기도하는 한 사람

기도하는 한 사람


 “존경하는 분은 누구죠?”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님입니다.”


 입사지원서를 훑던 면접관이 고개를 든다. 누가 누구를 인터뷰하는지 모를 어색한 풍경을 뒤로하고, 마침 선릉역 근처에서 일하던 윤희상 선배와 술잔을 나눴다.      


 2001년 6월,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 ‘사립학교법 개정 국민운동본부’ 천막을 드나드는 마음은 무거웠다. 희상이 형을 비롯한 십 수 명이 부당징계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뜻을 달리하는 학생들의 모진 비난과 외면 속에 지쳐갈 때,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은, 정의롭지 못한 법을 바꿔내, 학교법인의 전횡에 희생된 동지들이 되돌아올 길을 트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노총이 이끌어준 손은 두고두고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주말에 예식장이나 이삿짐센터에서 품 팔아 번 돈으로, 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 ‘풀무질’, ‘논장’, 그리고 숱한 헌책방을 뒤졌다. 농성장에서 심부름이라도 하려면 배우고 공부해야했다. 선후배들과 며칠을 두고 독파해간 책 더미엔 손때가 까맣게 묻어갔다. 


 그러나 언제고 한결같으리란 다짐이 무색하게, 녹록치 않은 현실에 마음은 뒷걸음쳤다. 학사경고에 이은 양현재養賢齋 기숙사 퇴실, 달리 손 벌릴 곳 없기에 조여 오는 경제적 압박...다른 무엇보다, 도서관을 하얗게 밝혀 고시나 취업준비를 해 나가는 또래들을 보며 불안에 시달렸다. 초조함을 들킨 나머지 한 친구에게, 이제 그만 유턴U-turn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야 만다. 


 결국, 도망치듯 학교를 떠났다. 어리석고 나약하다는 자괴감과, 혼자 내뺐다는 죄책감에 오래도록 슬펐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대사를 흉내 내며 씩씩거렸다.      

 만덕산에 머물던 어느 저녁, 원석이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물론자唯物論者로 알던 사람이, 유심론唯心論인 불교 출가자가 되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다. 


 “부당한 징계에 맞서던 그때나, 불가佛家에 발들인 지금이나 제 마음은 같아요. 사람에 대한 사랑,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는 낙관. 따스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 저는 그 마음을, 기억을 잊지 않아요. 유물론자도 유심론자도 아닌 휴머니스트. 이게 제가 서고자는 길이니까요.”     


 직장인에서 공무원, 판사에 이르기까지 이제 각자의 길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옛 동지들. 생각이 달라지고 아저씨가 다 되었을지라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그대로다. 용산역 시끄런 주점에 앉아 소주잔에 사이다를 채우며 “우리 중 기도하는 사람 하나는 있어야겠지.” 수줍은 마음을 전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 사홍서원四弘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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