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을 놓아라
엄마 품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 아빠는 최고로 힘 센 사람이었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 믿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무릎에 안겨,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가문家門의 옛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림 많고 쉽게 풀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헤지게 읽으며, 환인桓因으로부터 비롯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알아갔다. 조금 더 나이 들어선, 배달국의 치우천왕蚩尤天王이 황제와의 전쟁에 져 죽는 장면에 분통 터뜨리기도 했다. 공자가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설이 자랑스러웠고, 자연스레 민족종교에 흥미를 가졌다. 군부대 근처에 살며, 국기 하강식 빵빠레가 울리면 누가 뭐라 안 해도 하던 동작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부국강병이라는 말에 설레던 어린 민족주의자는 박정희 전前 대통령 얼굴이 크게 들어간 우표를 지갑 안쪽에 넣고 다녔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근대 독일의 기틀을 마련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로 옮겨갔고, 다시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치달았다. ‘나의 투쟁’을 끙끙대며 읽던 나는 고작 중학교 3학년이었다.
1994년 3월,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남북관계가 위기로 몰릴 때, 관심은 공산주의로 흘렀다. 칼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숨어 보고, 때마침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을 몰래 훔쳐봤다. 대학 들어가기 전에 이미 강만길의 ‘한국 근・현대사’와, ‘풀빛’에서 나온 네 권짜리 ‘한국현대사’를 혼자 끝내고 으쓱했다.
감히 무슨 주의자라고하기엔 너무 부족하고 염치없는 일이지만, 세계를 피로 물들이는 전쟁의 주된 원인을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자원을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사회갈등의 양상을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간의 투쟁이라 말하면서, 부당하게 징계 받아 쫓겨난 선후배들을 어떻게든 구해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대학시절의 나는, 남들 눈에 영락없는 유물론자唯物論者였을지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조금 더 넓어진 건, 정수일의 ‘씰크로드학’을 접하고 부터다. 모든 문명은 서로를 머금고 있으며, 교류를 통해 문명은 상호 발전해 왔고, 대립과 충돌보다는 관계와 공존에 초점을 두는 그의 시선에 마음이 머물렀다. 그리고 원불교를 만났다.
지난 삶을 회고하면, 내가 옳다 믿고 행동의 기준으로 삼은 이념과 사상은, 상황과 조건에 맞게 끊임없이 그 이름을 달리하며 쓰여지다 스쳐간 손님이었다. 앞으로도 내 사상편력은 글로 쓰여 진 원불교 경전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스승님이 내려주신 이론과 방법은 단지 예리한 칼날일 뿐. 번뇌 끊은 그 자리에, 얽매일 관념과 숭배할 우상 따윈 없으리라.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임제선사臨濟禪師께서 일갈하지 않았던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마침내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