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잘 하겠다
아궁이 불길이 이글거린다. 잘 마른 깻대를 쏘시개 삼아 타닥타닥 불을 지피고, 패 둔 후박나무 장작을 한 개비 한 개비, 포개지지 않게 바람 드는 길을 열어가며 밀어 넣었다. 변소에서 거둔 휴지마저 땔거리로 타 올렸다.
모르는 새 뒤에 농타원 법사님이 다가오셔서, 정산 종사님도 불 때는 일부터 시작했다 말씀하시고 이내 자리를 지우셨다. 후박나무는 불땀이 약해 저녁 종을 치고 자리에 들기 전에 한 다발 더 넣어야했다. 작은 나무 보일러에 여럿이 의지하다보니 방 온기가 미지근하다.
누우니 상념에 젖는다. 직장을 놓고 시린 거리로 나선 것도, 이후 바친 열정과 노력 모두, 누구도 아닌 ‘나’의 선택이었다. 아팠지만 후회는 없다. 실패 역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그리고 이제, 운명이라는 결에 새로운 선택이 맞물리며 자아내는 흐름에 든 ‘나’를 바라본다. 그 흐름에 ‘나’를 내맡겨보기로 했다. 바람에 몸 실은 돛단배처럼.
초선지 가는 길 가, 새로 짓는 선원禪院은 동트기 전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일꾼들로 분주했다. 골조가 한창 올라가는 곁, 컨테이너 박스 안 귀퉁이에서 농타원님은 아침저녁으로 기도 드리시고, 나는 세렉스 트럭을 몰며 만덕산을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그해는 유달리 날이 맑고 가물어 공사가 쉼 없이 진척됐다.
깊은 어느 밤, 예고 없이 농타원님이 찾으셨다. “날이 밝으면 너는 여기를 떠나야하니 어서 짐을 싸라.” “네 알겠습니다.” 두 말 없이 돌아서 문을 닫고 나서려는데, 다시 불러 앉히셨다. 미륵산 아래, 좌산左山 종사宗師님이 머무시는 상사원上師院에서 급하게 사람을 구하고 있어 추천하셨다고 한다.
교단의 큰 어른을 모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니만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 이어, 당신에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며, 여기서의 일은 다 잊으라고, 나도 너를 잊겠다고 이르셨다. 몹시 바빠 한 사람이 아쉬운 만덕산에서 혼자 몸을 뺀다는 게 마음에 몹시 걸렸다.
이미 몇 달 전, 고추걷이가 한창이던 만덕산 늦가을에, 농타원님 손에 끌려 좌산 종사님을 뵙고 인사드린 일이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계시기도 했지만, 어른께서는 그냥 한번 흘낏 쳐다보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눈길을 더 이상 주지 않으셨다. 민망한 마음에 구석에 앉아 있는데, 때를 기다려 농타원님이 두 번 더 소개 올려서야 비로소, “하면 잘 하겠다.” 이게 다였다.
나에겐 시시했던 그 한마디를 농타원님은 허투루 흘리지 않으시고 간직하셨다가, 시절인연이 되자 어른 곁에서 잘 배워 성장해가라고 미련 없이 놓아주셨다.
“하면 잘 하겠다.” 이 말씀을 새겨, 지금도 오직 할 뿐이다.
제자나 후배를 키울 때에 지도자는 먼저 자신의 힘을 헤아려 보고 또 후배의 근기根機도 정확히 파악하고 지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근기를 조롱박으로 만들 수도 있고, 잘못하면 수승殊勝한 제자로 인하여 서로 사이가 멀어지거나 죄를 지을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 나보다 더 수승한 스승에게 법맥과 신맥을 이어 주어야 올바른 스승인 것이다. 이 점 명심하라. - 원불교 대산3집 1:20
*정산 종사(鼎山宗師): 소태산 대종사의 뒤를 이어 원불교 종법사를 역임한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