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겠지

by 시우

꽃은 피겠지


짐은 단출했다. 몇 벌 옷에 낡아 튿어진 성학십도聖學十圖 한 권. 만덕산에서 구룡마을 용은정사로 커피 방울 나리듯 흘러들었다. 한 방을 쓰게 된 홍성훈 교무님과 인사하고 구석에 앉아 가방을 풀었다. 마침, 출가하여 원불교학과에 편입한 손님이 와 계셨다.


두루 빼어난 만큼의 시샘 아래 지치고 슬픈 그분의 토로에는, 노력하지 않는 어린 수행자들에 대한 실망이 짙게 배어있었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뭐든 다 이룰 텐데, 자기 게으른 건 모르고 시기 질투만 일삼는단다. 성실하지 않아 못한다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울컥했다.


“저기... 근데요”

“그럼 사법시험 합격자 중 꼴등은 성실한 사람이고,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사람은 게을렀단 건가요? 커트라인 언저리에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있는데...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노력한다고 모두 교우敎友님처럼 서울대 가는 건 아니잖아요.”


노량진과 신림동살이에서, 게으름만으로 돌리기 어려운 실패를 숱하게 보고 겪었기에, 아물다만 생채기가 순식간에 도졌다. 십 수 년을 행정고시에 매달리다, 삼겹살집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공부가 잘 안된다며 펑펑 울던 동림이 형, 유림독서실 담벼락에 살던 길량이를 유독 챙기던 희규 형. 미국 오기 전, 동네 도서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여전히 고양이에게 빵 부스러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변호사의 꿈을 접고 9급 공무원을 준비한다고 했다.


사시 2차 합격자 발표 날이면, 신림동 골목골목은 부서지고 깨져 쓰레기 난장판이 되었다. 누군가는 떨어져야 했고, 자살이 줄 이었다. 붙어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포기하고 나가든 어차피 고시촌은 아주 머물 곳이 아니었다.


‘한 번 더’라며 남은 이들은 다시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혈관에 흘려보내며 학원과 고시원을 맴돌았다. 나날이 가벼워지는 주머니에 싼 끼니로 허기를 달래고, 싼 방을 찾아 옮겨갔다.


해가 거듭될수록 깊어가는 불안과 공포는 선량한 이들 마저도 어그러뜨리고 만다. 합격생에 대한 시기 질투는 곧잘 자책감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성실’은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왔다. 자기 딴엔 열심히 해도 자꾸 안 되니까, 불합격을 남 탓으로 돌리게 된다. 가까운 가족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나 역시 청춘의 한 때를 그렇게 보냈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아서’ ‘성실하지 않아서’ 안 되는 걸 모르고, 질시나 한다는 말이, 나에겐 건드리면 폭발하는 역린逆鱗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고, 뭘 해도 막히는 때가 있다. 이를 주역周易에서는 ‘대축大畜’이라 한다. 따라서 ‘되고 안 되고’, ‘잘하고 못하는 건’ 성실만의 문제는 아니다. 저마다의 ‘때’가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거꾸러져 본 사람은 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의미, 운칠기삼運七技三의 의미를.


당해낼 수 없는 상실의 시기를 맞았다면, 하던 걸 놓고 인생의 방향로를 틀어야 산다. 아무리 지난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도 놓아야 한다. 물러서야할 때 물러서는 것, 그것이 용기고 그것이 지혜다.


이른 봄, 뉴욕교당에 머물며 음악대학원 입시를 치렀던 J. 세 번째 도전이었다. 가을에 학생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끝내 소식은 없다.


곁에 있다면, ‘열심히 했잖아. 이제 그만 놓아도 돼. 그게 네가 살 길이야. 나도 그랬으니까. 다시 만나는 그날 우리는, 성공에 겸손하고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 낙오한 이들에게 게으르단 질타대신, 따뜻하게 보듬어줄 넉넉한 품을 가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사루비아 꽃을 좋아한다는 J. 오는 비 소식에 맞춰 씨를 뿌린다. 꽃은 피겠지.


...무슨 일을 하다가 실패하면 패운이 왔구나 하여 놓아 버릴 것은 놓아 버리고 손해 볼 것은 손해 봐서 거두어 넘어가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깊은 데로 빠져 들어가 이중삼중으로 겹쳐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최저가 최고임을 알아 최저로 해서 청산해야 된다. 나도 원평과 양주 그리고 서울에 있을 때 최저였다. 그러나 그 때가 또한 최고였었다. - 원불교 대산3집 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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