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라
“이제 그만 지리산에서 내려가야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신통력이 생겼다거나 불로장생의 비결을 눈치 채서가 아니었다. 뉴욕에서 날라 와 바퀴달린 큰 가방을 끌며 산길을 걸어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하산을 떠올린 나는 여전히 불혹을 넘긴 철부지였다.
어떤 분들은 땡볕에 뜨겁게 달궈진 컨테이너하우스에서의 여름나기와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매서운 겨우살이를 근래에 보기 드문 수행자의 모습이라 치켜세우기도 했지만 그건 단지 타인의 시선일 뿐 우쭐댈 것 하나 없었다.
몸을 괴롭히는 고행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中道)도 아니거니와 견뎠다기보다는 그저 살만해서 머물렀을 따름이다. 박한 땅에 자기를 떨군 바람을 탓하지 않는 솔씨처럼 놓인 환경에 적응하면 그만이었다.
봄에는 고사리를 끊고 가을에는 배추밭을 일구니 앞가림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따금 다녀가는 도반들의 보시로 도량살림은 조금씩이나마 불었다. 하지만 홀로 글 쓰고 책 읽고 명상하는 평화로운 나날을 3년이나 즐기던 어느 날 아침 문득 이 호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지금 누리는 달콤한 안락에 젖어 미적대다보면 지난 날 지어둔 복이 다한 찰라 단물 빠진 껌처럼 내쳐질 테니 늙고 병들어 거리로 떠밀리기 전에 진리의 끄나풀이라도 더위잡으려면 더 이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한 삶의 터전으로 나아가 살아있는 화두를 잡으리라 곱씹었다.
때마침 은사(恩師)께서 나를 찾아 지리산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먼저 찾아뵙는 게 도리라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후 익산 미륵산 뒷자락 구룡마을로 차를 몰았다. 편찮으신 어른께서는 아담한 황토방에 몸을 뉘이고 계셨는데 시자(侍子)가 내가 왔음을 알리자 병석에서 일어나셔서 차와 다식(茶食)을 건네시더니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자네가 라오스에 가 줘야겠네.”
“네 알겠습니다.”
산 설고 물 선 나라로 간다는 걱정 따윈 없었다. 다만 당신의 포부를 과연 내가 얼마만큼이나 담아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허나 나른한 소요(逍遙)가 아닌 번뇌의 소용돌이 안에서 다져진 마음의 힘이라야 열반에 이르는 길에 놓인 장애로부터 자유하기에 머뭇거림 없이 길을 떠났다.
서원(誓願)이 이끄는 대로 라오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쌍윳따 니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