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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06. 2022

거북아 거북아

거북아 거북아


 “저 군대 가요. 학점은 알아서 주세요.” 1997년 12월 9일, 기말고사를 보다 말고 입대했다. 스무 살의 나는 답답했다. 학점 따는 공부도, 시급 1,800원짜리 아르바이트도, 김빠진 콜라 같던 학생운동도 다 시큰둥했다.


 그해 여름, 교보문고 동양철학 코너에서, 내 어깨를 두드려 말 건네며 다가선 한 누나에게 들려주려, 클래식기타 동아리에 들어, 짧던 손톱을 길러가며, 학생회관 서편 석양이 아름답던 그 자리에 앉아, 입대까지 남은 날을 하루같이 기타를 잡았지만, 끝내 나는 ‘로망스’를 연주하지 못했다. 입대 전날, 학교 구내 이용실에서 국현이, 의수, 동후를 뒤에 두고, 반백의 이발사 아저씨는 바리깡을 들어 머리칼을 바짝 쳐주셨다. 


 청량리역 삐쭉 솟은 멋없던 시계탑, 차가운 광장에 모자를 눌러 쓴 청년들이 시간을 두고 드문드문 모여들었다. 검붉은 체크무늬 코트에 빨간 뿔테안경을 낀 나는 어머니와 춘천행 기차를 탔다. ‘카니발’의 ‘그땐 그랬지’가 객실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남춘천역에 내려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고 102보충대에 들어섰다. 멀리 겹겹이 놓인 눈 덮인 준엄한 산세에 기가 눌렸다.


 이튿날, 15대 대통령선거 부재자투표를 마치고, 마음이 끌리는 데로 불교를 택해 종교행사에 참석했다. 등을 사면 전역 날까지 매일 불을 밝혀 법사님이 기도해주신다는 말씀에, 만 원을 내어 값을 치렀다. 마지막 날, 산이 험해서 무장공비도 그 길은 피한다는 중동부전선 승리부대로 이동했다.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그리고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활자가 그리웠던 나는 신약성경을 골라 신병교육기간 내내 탐독했다. 그 시절, 군복이 여전히 어색한 우리 모두는 ‘오리온교’ 신자였다. 교회에서 오리온 초코파이를 다른 데보다 하나 더 준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전 주에 수계식을 치렀던 훈련병들이라도 다음 주에는 기꺼이 세례를 받았다. 다함께, 할렐루야(초코파이)! 아멘(커피)!     


 신병교육을 마치고 상급부대에서 자대배치를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병사 한명이 와서, 전역을 얼마 안 남기고 후임을 찾고 있다며, 행정병으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리되면 입대 전이나 후가 달라질게 하나 없다는 생각에,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하자, 그는 어이없는 듯 웃으며, “너 삽질 잘해?”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최전방 말단부대 소총수가 되어, 한국전쟁 격전지였던 대성산 중턱에 자리한 폭풍중대 악마소대에 배치 받았다. 그리고 2년간 야전에서 모질게 삽질했고, 그 순간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어느 일요일, 행정실에서 근무하던 하태걸 일병이 전공이 뭐냐 해서, 유학儒學이라 답했다. 


불교 비슷한 걸 공부했으니 대대 법당에서 같이 봉사하자고 이끌었다. 법당이라고 간 곳은, 1996년 수해로 난 산사태에 반파된 막사였다. 당시 불자佛子였던 한상기 대대장이, 남은 반쪽 막사를 법당으로 고쳐, 지장보살을 본존불로 모시고, 아래 켠에 탑을 세워, 희생된 장병들의 넋을 기렸다. 


 법당 외벽에는 3류 극장 영화간판만도 못한 엉터리 불화가 그려져 있었다. 군종법사님도 오시지 않는 그 법당에서, 하태걸 일병과 나는, 매 일요일 법회자리를 지켰고, 일주일에 하루, 밤 10시에 초코파이와 따뜻한 커피를 마련해 경계근무 서던 병사들을 찾아갔으며,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선 연등을 만들어 달아 올렸다. 그때의 하태걸 일병이 지금의 하태은 교무님이 되었으니, 나와 원불교의 인연은 그로부터 비롯되어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르렀다.      


 100년에 한 번, 숨을 쉬기 위해 바다 밑에서 올라오는 눈 먼 거북이가, 수면 위를 떠돌던 구멍 뚫린 나무판자에 목이 걸리기만큼 어려운 게, 사람으로 나서 불법을 만날 인연이라는데, 나는 그렇게 부처님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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