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영등 Dec 06. 2022

찬바람 불면

찬바람 불면


 찬바람 불면 기침이 잦아져, 따스한 봄이 오기까지 멎지 않는다. 꽤 오랜 세월을 기침을 안고 겨울을 났다. 담타원 법사님께서는 밤낮으로 쿨럭대는 내가 가여우신지, 워싱턴교당 곁에 있는 보화당한의원에 다녀올 시간을 내어 주셨다.       


 2003년 봄, 아버지는 독한 감기로 몸져누우셨다가 급기야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결핵으로 쓰러진 당신을 맞을 격리실이 따로 없어 여러 곳 수소문하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북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폐결핵 중증환자만 모인 병동엔 몸 깊은 데서 거칠게 울려오는 기침소리 가득하고, 아버지는 하나 둘 죽어 떠나는 맞은편 환자들 이야기를, 병 수발 차 들른 어머니와 내게 힘들게 들려주곤 했다. 다행히 급한 고비를 넘겼으나, 쇠약해진 아버지는 그나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했다. 이미 아버지와 골이 깊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많았던 터라, 그의 아픔에 나는 냉담했다.       

   

 아버지의 병치레와는 별개로 나는 나대로 그 해 가을, 대기업공채를 준비했다. 바램이 있다면 그저 소시민으로 제 앞가림하며 아내 그리고 아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취업시장의 매물로 스스로 나선 ‘나’를 팔기 위해, 지원서 칸칸이 학교, 전공, 학점, 토익성적 등을 부지런히 채워냈다. 이십대를 수놓았던 가치나 열정이 담길 곳 없이, 기업이 원하는 수치로 재단된 내 삶이 서글퍼, 서류를 넣을 때마다 술잔을 홀로 기울이기도 했다. 


 적잖은 마음고생이 헛되진 않아, 시월 말미에 한 회사로부터 최종면접 합격 소식을 받았다. 미처 학기가 마치기 전인 12월 1일부터 출근하라기에 염려스러웠지만 교수님도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선후배들에게 술도 샀다. 


월급쟁이가 큰 벼슬이나 되겠냐마는 테헤란로를 거닐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님은 자랑스러워 하셨다. 하지만 첫 출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용신체검사에서 폐결핵의심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왼쪽 폐 3분의 2 가량이 뿌옇게 찍힌 X선 결과를 보여줬다. 남편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불행에 어머니는 비통해하셨다. 독한 약에 정신은 흐릿했고 몸은 오렌지색 소변을 쏟아냈다.


 신체검사가 허술한 작은 회사를 찾아 일단 아무데라도 당장 들어가라는 부모의 억지스런 다그침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헤아리고 안아드릴 만큼의 품이, 그때 내겐 없었다. 병든 실업자가 된 초라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견딜 수 없이 슬퍼, 졸업식에도 가지 않은 채, 결핵약에 취해 넋 잃고 누워있었다. 


 거실에서 아버지의 가래 끓는 기침소리가 들렸다. 왜 약을 제때 챙겨먹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의 짜증이 섞여드는데, 눌러왔던 화가 터져 방문을 걷어차며, 아들 인생 망쳐놓고도 왜 약을 안 먹느냐며 악다구니를 부렸다. 그날 서로에게 남겨진 생채기는 깊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분노를 이고 살았다.     


 찬바람이 불면 병들었던 내 허파는 기침을 토해내며 아픈 옛 기억을 끌어올린다. 나의 슬픔, 나의 분노 그리고 죄책감... 다시 찬바람이 불면, 그 못났던 나를 안아준다. 다 끝났다고. 슬픔도 분노도 이제 나는 아니라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거북아 거북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